"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가공된 설정보다 일상이 더 중요하다."
이준익 감독이 영화 ‘사도’와 ‘동주’, 그리고 ‘박열’을 잇는 웰메이드 시대극으로 돌아왔다. 배우 설경구, 변요한과 함께 진한 여운을 남기는 작품으로 관객들과 만나게 됐다. 오는 31일 개봉을 앞두고 있는 영화 ‘자산어보’다.
이준익 감독은 19일 오전 온라인으로 진행된 영화 ‘자산어보’ 개봉 인터뷰에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처음 사극에 도전하는 설경구의 연기부터 변요한과의 만남, 그리고 ‘자산어보’를 통해 정약전의 이야기를 다루는 이유까지 전했다.
‘자산어보’는 흑산으로 유배된 후 책보다 바다가 궁금해진 학자 정약전(설경구 분)과 바다를 벗어나 출셋길에 오르고 싶은 청년 어부 창대(변요한 분)가 자산어보를 집필하며 벗이 되어가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자산어보’는 기존의 사극과는 다른 결을 따르는 작품이다. 역사적 사건이 영화의 시작을 알리긴 하지만 그 사건에 중심을 두기보다는 이후의 삶, 일상에 대해 집중한다. 정약전이 유배 이후 어떻게 ‘자산어보’를 집필하게 됐는지, 창대와 어떤 관계를 맺고, 일상을 살아갔는지 담담하게 담아냈다.
이준익 감독은 ‘자산어보’, 정약전을 영화의 소재로 삼은 것에 대해서 “보통 사극 하면 거대한 사건이나 정치적 이슈, 전쟁, 영웅 이야기가 주로 접근하는 거다. 나도 그런 것을 해봤다. 사극을 찍을수록 사건보다 사연에 더 관심이 간다. 상업적인 목적으로 사극을 기획한다면 누구나 아는 인물, 누구나 아는 사건과 전쟁에 휘말린 인간들의 군상, 영웅에 열광하는 관객 이런 게 사극을 기획하는 패턴이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그런 가공된 설정보다 일상이 더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이어 이준익 감독은 “보통 현대물에서는 일상이 소소하게 표현되는 영화들이 더러 있는데, 사극에서 일상을 보여주는 영화가 과연 있었나? 사극 영화에 대체적으로 일상이 없다. 처음에 영화 시작할 때만 신유박해라는 정치적 사건이 있고, 유배 후에는 그저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일상만 있는 거다”라며, “일상 속에서 존재하는 인간이 그게 진짜 인간이지, 어떤 거대 사건이나 전쟁에서 내몰려진 인간은 도구일 뿐이다. 도구 이상 그려낼 수 없다. 영화를 자꾸 찍다 보니까 일상을 통해서 인간을 보여주는 것이 더 올바르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접근하게 된 게 정약전이었다”이라고 ‘자산어보’가 탄생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물론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고증도 철저히 했다. 정약전에 대해서는 사실 그대로 담으려고 노력했고, 다만 기록에 이름만 나와 있던 창대 캐릭터의 배경은 이준익 감독이 허구로 만들어냈다.
이준익 감독은 “’역덕’이란 말이 있다. 역사 덕후 장난 아니다. 만약 실화를 바탕으로 고증을 노력하겠다고 해놓고 만약 고증에 어긋나는 게 있으면 그 ‘역덕’들이 아주 탈탈 턴다. 고증을 자신 있게 한다는 말은 절대 못한다. ‘박열’이란 영화는 다행히 일본 서적이 아주 정교한 게 있어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 ‘자산어보’는 양면성이 있다. 한 면은 정약용이라는 정씨 집안의 이야기가 정약용이 덕에 많은 자료들이 있다. 정약전은 잘 없다. 하지만 같은 집안, 같은 형제이기 때문에 대충 모습을 유추하기는 용이하다. 정약전은 사건의 배열에 맞춰서 적당한 고증을 확보했다”라고 밝혔다.

창대 캐릭터에 대해서는 “창대는 ‘자산어보’ 책에 이름만 있다. 허구로 창작하기 아주 적합하다. 아주 영화적으로 만들 수 있다. 창대마저도 고증이 남아 있다면 의도적으로 바꾸면 왜곡이 된다. 창대는 이름과 역할만 있지 배경이 없어서 배경을 만든 거다. 허구의 수단을 통해서 영화가 지향하는 목적에 도달하는 것이 진실돼 보이면 그 허구는 허용치 안에 들어와 있다고 돼 있다. 그래서 서문에 고백을 하고 영화를 시작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준익 감독은 ‘자산어보’를 통해서 다시 한 번 흑백영화로 관객들을 만나게 됐다. 앞서 ‘동주’를 통해 흑백영화의 성공 가능성을 입증한 이준익 감독. ‘자산어보’에서는 좀 더 밝게, 그리고 세심하고 풍성하게 화면을 구성했다. 흑백영화지만 영화를 꽉 채우는 배우들이 연기와 흑산도의 풍경은 영화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준익 감독은 ‘자산어보’의 흑백 연출에 대해서 “‘동주’ 때와 다른 면이 있다. ‘동주’는 어째든 제작비 5억 원의 저예산 영화를 시도한 거다. 그렇다 보니까 카메라 장비도 아주 저렴한 것, 영화 찍는데 잘 안 쓰는 것으로 찍었다. 흑백의 질감이 굉장히 그야말로 저렴하다. 상업적인 소재가 아닌데 영화로 하려면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그 많은 장소를 찍으려면 제작비가 엄청나다. 이런 이야기가 상업적으로 실패하게 되면 또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터전을 망가트릴까봐, 망하지 말아야 한다는 마음이 컸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적지 않은 성과가 있어서 ‘자산어보’를 과감하게 해보자고 했다. 엄청나게 큰 제작비는 아니지만 ‘동주’보다 좋은 여건을 조성하려고 노력했다. 조선시대를 흑백으로 만들 수 있는 기회는 그리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단 한번의 기회에 최선을 다하는 흑백을 찍으려고 노력했다”라고 밝혔다.
이준익 감독은 “색감이 없으니까 질감으로 모든 디테일을 표현하려고 했다. 의상, 미술, 인물의 분장, 세트 그런 것들이 ‘동주’보다 훨씬 섬세하게 구현됐다. ‘동주’에서는 자연이 별로 없다. 좁은 공간에서 저예산으로 찍으니까. 섬이라는 자연의 유리한 환경을 잘 담아내려고 노력했다”라고 덧붙였다.
‘자산어보’를 흑백영화로 연출할 수 있었던 배경은 ‘동주’의 성공으로 얻은 자신감 덕분이었다. 저예산 영화인 ‘동주’는 개봉 후 좋은 평가를 받으며 의미 있는 작품으로 남아 있다. 단지 스코어의 문제가 아니라 ‘동주’라는 영화가 주는 의미가 컸고, 작품의 완성도가 높았기에 가능한 호평이었다. 이준익 감독은 ‘자산어보’도 ‘동주’처럼 몇 년 후에 자리를 잘 잡는 영화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이번 영화의 또 다른 관전 포인트는 설경구의 사극 도전이다. 데뷔 이후 처음으로 사극에 도전하게 된 설경구는 안정적인 연기로 정약전 그 자체가 됐다. 처음 하는 사극 연기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극에 들어간 설경구였다. 이준익 감독 역시 영화 촬영을 시작하기도 전, 테스트 촬영에서 설경구를 보며 같은 마음을 느꼈다고.
이준익 감독은 설경구의 첫 사극에 대해서 “설경구 배우가 조심스러운 성격이다. 한 번도 안 해 본 사극을 할 때, 테스트 촬영을 하는데 한참 시간이 걸려서 분장하고 나타났는데 깜짝 놀랐다. 설경구가 아니다. 그때 내 기억에”라며, “내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와 한 방을 썼는데, 우리 할아버지도 선비 정신을 가지고 계셨다. 어릴 때 내가 봤던 할아버지의 그 이미지가 카메라 앞에 딱 서는데 그냥 연기에 대한 잡스러운 대화가 필요 없었다”라고 회상했다.
이어 “그냥 설경구가 정약전이라는 느낌을 나 뿐만 아니라 만장일치로 받았다. 영화 찍기도 전에 분장 테스트할 때 이미 훅 다 들어왔다. 이정은 씨도 보고 깜짝 놀랐다. 영화 찍기 한 달, 열흘 전 쯤인데 그 사진을 보면 내 말에 동의할 것”이라고 덧붙이며 영화에 대한 기대를 당부했다.
설경구와 사제를 뛰어넘는 벗이 되는 창대를 연기한 변요한 역시 뒤지지않는다. 변요한은 생동감 있는 연기, 섬세한 표현으로 창대의 변화를 스크린에 담아냈다. 설경구와의 호흡 역시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이준익 감독은 “(시사회에서)변요한 배우를 봤는데 영화 후반쯤 가니까 이 친구가 영화를 제대로 못 보고 계속 눈을 붙잡고 울더라. ‘영화를 봤나’ 싶을 정도로 격한 감정으로 영화를 보고 있더라”라며, “변요한 배우가 말을 할 때 화려한 수식이나 꾸미는 것을 잘 못하고 하기 싫어한다. 그렇다 보니까 단문으로 던진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자세히 이야기하지 하는 아쉬움이 있을 수 있다. 온전하게 진실된 감정의 표현으로 항상 보고 있다. 그게 변요한 배우가 가지고 있는 인성이라 존중한다”라며 칭찬했다.

또 변요한의 캐스팅에 대해서는 “사실 처음에는 변요한 볼 생각을 안 했다. 싫어서가 절대 아니다. 일단 설경구 배우가 정약전을 하는 게 더 중요했다. 설경구 배우가 하고 나면 그때 창대 역할을 생각해 보겠다고 미뤄놓은 상태였다. 설경구 배우가 하기로 하고 ‘변요한 어떄요?’ 그러는 거다. 그래서 ‘해주면 좋지’ 했다”라며, “사실 시나리오 쓸 때 배우를 구체화시켜서 쓰지는 않는다. 스케줄이 안 된다거나 여건이 안 돼서 그 배우가 못하면 그 디테일에 대한 선입견이 방해를 준다. 캐스팅을 하려고 마음을 먹을 때 머릿 속에서 비춰본다. 근데 변요한 이야기를 듣는 순간 머릿 속에서 붙더라. 그 느낌이 있다. 주니까 바로 하겠다고 했다. 설경구의 제안과 창대라는 인물의 구체적 상상이 잘 매칭됐다. 아주 만족한 작업을 할 수 있었다”라고 밝혔다.
설경구, 변요한과 함께 씬스틸러로 활약한 배우가 이정은이가. 흑산으로 유배 온 정약전을 보살피는 가거댁 역을 맡은 이정은은 영화의 강약을 조절하며 양념 역할을 해냈다. 설경구와 학교 선후배 사이로 이미 절친했기 때문인지 조화롭게 극에 녹아들어 존재감을 드러낸 이정은이다.
이준익 감독은 이정은에 대해서 “배우로서의 평가는 우리가 더 검증할 필요가 없다. 배우 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훌륭한 분이다. 정말 훌륭한 분”이라며, “영화 장면 중에서 무식한데 그게 너무 사랑스럽게 나오는 부분이 있다. 진실돼서 너무 사랑스러운. 그 연기를 그렇게 할 수 있는 배우다. 그 느낌에 반하는 거다. 이정은 배우는 그런 사람”이라고 극찬했다.
‘자산어보’는 이렇게 이준익 감독과 연기 잘하고 매력적인 배우들의 만남으로 완성된 작품이다. 역사 속 인물을 통해 시대를 꿰뚫는 이준익 감독의 시선이 다시 한 번 관객들에게 진한 감동을 선사할 것으로 기대된다.
오는 31일 개봉. /seon@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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