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는 다 똑같다. 좋은 작품을 만나고 싶다.”
배우 길해연(58)이 “저는 소모적이고 기능적이지 않은 역할을 만나고 싶다”고 이같은 바람을 전했다.
그녀는 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에서 차분한 어조로 카리스마를 발산했고,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에선 결혼을 재촉하는 기센 엄마의 등쌀을 표현했다.
길해연은 1일 오후 온라인을 통해 진행된 인터뷰에서 “하던 대로 하는 게 아니라, 늘 새롭게 연기하고 싶다. 아무래도 연기 잘하는 배우라는 말을 들을 때가 제일 좋다”고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길해연은 영화 ‘미드나이트’(감독 권오승, 제작 페퍼민트앤컴퍼니, 제공 CJ ENM TVING, 배급 CJ CGV)에서 청각장애인 역할을 맡아 배우 진기주(33)와 모녀로 호흡했다. 출연이 확정된 그날부터 수어를 배우며 캐릭터에 파고들었다.
‘미드나이트’에 출연을 결정한 이유에 대해 “처음에 시나리오를 봤다. 제가 원래 스릴러 장르를 좋아하는데, 단순 스릴러가 아닌 그 안에 담긴 메시지가 좋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경미(진기주 분)가 자신도 어려운데 위기에 처한 소정(김혜윤 분)을 돕는다. (여성이)유대관계를 갖는 걸 보면서 가슴이 울컥했다. 스릴러지만, 연대의식에 관한 얘기”라고 방향성을 강조했다.
길해연은 이어 “장애인 비장애인을 떠나 소통이 잘 안 되는, 우리네 현실을 담기도 했다고 생각했다. 시나리오를 읽으며 ‘영화로 어떻게 만들어질까?’ 궁금해서 보자마자 하겠다고 했다”고 출연 과정을 설명했다.

“시나리오를 받고 바로 수어 학원에 갔지만 진기주보다는 대사량이 적다. 그래서 저는 (청각장애인을) 직접 만나보는 걸 택했다. 장애를 가진 선생님을 뵙기도 했다. 가르쳐주시는 분, (수어를) 쓸 수밖에 없는 분들이 쓰는 언어가 다르다. (장애인들은)언어의 생략도 많다. 그래서 저는 일상적으로 수어를 쓰고 싶어서 저만의 캐릭터를 찾고자 했다. 대사는 얼마 없으니 어떻게 경미 엄마를 그릴지 고민했다.”
그러면서 “제가 맡은 경미 엄마 캐릭터에 답답한 부분은 없었다. 말을 못 한다고 해서. 좀 더 경미 엄마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연기하려고 했다. 연기하면서 '배우 길해연’이 느껴지진 않았다”고 첨언했다.
‘미드나이트’는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의 폭주 등 장르적 전형을 재조합해 박제돼 있던 여성 캐릭터에 숨결을 불어 넣었다.

이에 길해연은 “(과거 작품들에는) 여성이 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존재로 그려졌다. 사회가 바뀌었기 때문에 여성이 주체적으로 나아간 게 담겼다. 앞으로도 여성 중심 서사가 많이 나올 거 같다. 남녀에 관계없이 골고루 다양한 소재의 작품이 나왔으면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배우 위하준(31)이 연쇄살인마 도식 역을 맡아 12~13kg 가량을 감량했다. 그녀는 “예전에 위하준이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에서) 아들 역할을 해서 각별한 애정이 생겼다. 장르물의 주인공이 됐다고 하니 응원하고 싶었다. 그 친구가 캐릭터를 위해 살도 많이 뺐고 눈빛도 달라졌더라. 제가 장난을 치면서도 ‘얜 정말 얼마나 힘들까?’라는 생각을 했다”고 후배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다음 작품에서 또 만난다면 괴롭히는 역할이었으면 좋겠다”는 그녀는 “위하준이 (전라도)완도 사람이라 묵직한 부분이 있다. 제가 괴롭히는 역할을 하면 재미있을 거 같다”고 말하며 웃었다.

길해연은 자신만의 연기법에 대해 “배우마다 접근하는 방식이 다르다. 저는 대본을 읽으며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한다. 그 인물에 대해 ‘왜?’ 라는 생각을 많이 하며 동화된다. 그 과정을 거치면 제 안에서 어떤 감정이 꿈틀거린다. 쓰지 않은 저 안에 있던 못된 것, 굉장히 선량한 것, 경거망동한 것들이 나온다. 아예 없는 것들이 아니라 제 안에 있던 누르고 있던 여러 감정들이 스멀스멀 나온다”고 설명했다.
진기주와 모녀로 호흡을 맞춘 길해연은 “저는 촬영 전 일부러 밥을 같이 먹으러 간다거나 하진 않는 편이다”라고 캐릭터에 몰입하며 자연스럽게 가까워진다고 했다. “수어를 하고 소통하면서 자연스럽게 맞춰나갔다. 촬영을 하고 서로 마주보면서 각자의 역할에 들어갔다”고 했다.
“후배들에게 연기 조언은 거의 안 한다”는 길해연은 “다른 작품을 할 때 조언을 구하러 오는 배우들도 많다. 근데 저는 제게 먼저 질문을 하지 않는 한, 어떻게 하라고 알려주진 않는다. 그 배우 스스로 캐릭터에 대해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한다. 한 신(scene)에서 저는 동등한 연기자로 선다”라고 자신만의 연기 철학을 밝혔다.

그녀는 1986년 연극을 통해 배우로 데뷔해 올해 35주년을 맞이했다. 무대에서 주로 활동하던 길해연은 2015년 방송된 ‘풍문으로 들었소’를 통해 대중적 인지도가 높아졌다.
“배우는 누군가 봐줘야 하는 사람이다. 혼자서 연기를 할 순 없으니 말이다. 물론 연극만 하면 (생활이) 힘들 수 있는데 저는 돈과 인기에 대한 집착이 없어서 생각없이 오래 한 거 같다. 물론 돈이 많지 않았지만, 연기하는 순간에 충실하며 살았다. 내가 좋아서 한 일이고 즐거웠기 때문에 (돈과 인기에) 구애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사실 저는 삶의 여정 속에서 도깨비불을 좇듯 살지 않았다. 대단히 큰 목표가 없고 아직 여정에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배우는 누군가의 관심이 없으면 존재감이 없다는 걸 잘 안다. 제게 관심을 가져주시는 분들에게 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저는 돈과 인기를 좇으며 살지 않았다. 감독님, 작품, 같이 하는 배우들만 보며 연기했다.”

그녀만의 작품 선택 기준은 당위성이 존재해야 하는 것. “역할이 크고 작든 상관이 없다. 제가 보기에 왜 있는지 이해가지 않는 인물이 더러 있다. 배우가 ‘내가 이걸 왜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면 안 된다. 돈과 인기 때문에 그냥 한다는 생각을 하면, 그때부터 배우는 가라앉게 된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길해연은 엄마 캐릭터는 물론, 시대의 관습과 대결하거나 그로부터 자유로운 여성상을 재현하며 남다른 작품 안목을 입증했다.
“악역, 선역, 엄마로 나누는 게 아니라 작품 안에서 그 사람이 가진 운명, 그것과 싸우는 과정, 비열함이나 정의로움을 표현하고 싶다. 흐르는 세월 속에서 내가 얼마나 더 인물을 표현할 수 있을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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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CJ ENM, 티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