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웠던 '호텔 인터불고 원주 월드 3쿠션 그랑프리 2021(인터불고 WGP)'가 막을 내렸다.
지난 18일 오후 강원도 원주에서 끝난 '인터불고 WGP'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따른 공백에도 '세계 랭킹 1위' 딕 야스퍼스(네덜란드)의 건재함을 재확인하는 자리였다. 동시에 실핀을 꽂고 불쑥 등장한 황봉주(38, 경남)의 거침 없는 도전에 아낌 없는 박수갈채가 울려 퍼진 순간이기도 했다.
야스퍼스는 이날 열린 개인전 결승서 황봉주를 세트스코어 3-0(18-3, 17-11, 23-4)으로 간단하게 제압,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지난 2020년 2월 터키 안탈리아월드컵 이후 17개월만에 펼쳐진 세계캐롬연맹(UMB) 공식 국제대회 '인터불고 WGP' 결승전은 여러 면에서 많은 것을 상기시켜줬다.
![[사진]파이브앤식스 제공](https://file.osen.co.kr/article/2021/07/19/202107190115779916_60f45551143d4_1024x.jpg)
▲왜 세계 1위인가
야스퍼스는 자신이 왜 세계 1위 당구 선수인지 분명하게 보여줬다. 인터불고 WGP는 기존 점수제와 달리 시간제를 채택한 대회였다. 정해진 점수에 먼저 도달하는 선수가 승리하는 방식이 아니라 시간 안에 누가 먼저 점수를 많이 뽑아내느냐 하는 방식이었다. 유럽 선수들에게는 특히 생소한 시스템이었고 실제 불만을 표출하는 선수도 보였다.
하지만 야스퍼스는 이번 대회를 온전히 즐기는 모습이었다. 그는 "나는 실험적이고 새로운 것을 좋아한다. 한 세트 25분은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었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다만 3세트가 15분으로 줄어드는 부분은 재고해줬으면 좋겠다"고 적극적인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결승전에서는 더욱 야스퍼스의 진가가 드러났다. 야스퍼스는 이미 8강에서 황봉주의 흔들림 없는 멘탈과 과감한 스트로크에 패배를 당했다. 때문에 야스퍼스는 결승전에서 철저한 수비로 황봉주의 거침 없는 공격력을 봉인시켰다. 황봉주는 계속 묘수풀이를 하다가 제풀에 지쳐갔다. 경기운영에서 이미 승패가 갈렸다.
▲왜 경험이 중요한가
야스퍼스는 결승전을 통해 경험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우치게 만들었다. 야스퍼스는 힘겹게 32강, 16강을 힘겹게 통과했지만 가파르게 상승하던 황봉주의 기세 앞에서 담담했다. 상대가 조바심이 나도록 난구를 제공해 황봉주를 흔들었다.
황봉주는 스스로 '멘탈이 강하다"고 자부했지만 결승 무대에서는 확연하게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부담을 이겨내지 못하면서 스트로크가 경직돼 보였고 쌓여가는 공타에 한숨이 길어졌다. 결국 2세트가 끝난 후 패배를 직감한 듯 가슴 속에서 뜨거운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3세트 시작과 함께 감정이 북받쳐 올랐고 무기력하게 눈물만 흘릴 수밖에 없었다.
야스퍼스는 경기 후 "어려운 상대인 만큼 우승이 쉽지 않을 것이라 봤다. 하지만 결승전이 진행되는 동안 점점 편안해졌고 집중도 잘됐다. 생각보다 빨리 긴장이 풀렸다"고 말한 반면 황봉주는 "처음엔 평소처럼 별 느낌이 없었다. 하지만 막상 결승전이 시작되자 긴장이 됐다. 상대 때문인지, 결승전 때문인지 모르겠다. 좋은 배치도 받지 못해 긴장 상태에서 팔이 굳었다. 그렇게 1~2세트가 지나갔다"고 털어놓았다.
황봉주는 이번 대회가 당구에 입문한 후 맞이한 첫 결승전이었다. 전국 대회를 경험했지만 8강이 가장 높은 순간이었고 국제 대회는 아예 출전 자체가 이번이 처음이었다. 세계 최고 자리를 가리는 무대의 부담감은 황봉주에게 무겁게 다가갔다. 황봉주는 "이기고 지고를 떠나 앞서 김준태와 플레이오프 2차전(3위 결정전) 때도 원하는대로 쳤기 때문에 결승전에서도 당연히 내 경기를 할 줄 알았다. 하지만 경험이 부족했다"고 인정했다.
![[사진]파이브앤식스 제공](https://file.osen.co.kr/article/2021/07/19/202107190115779916_60f4555165715_1024x.jpg)
▲야스퍼스가 황봉주에게 보내는 위로
야스퍼스는 우승 직후 세리머니를 마음껏 하지 못했다. 상대 황봉주가 앉은 자리에서 오열하는 모습을 보고 다가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 황봉주에 따르면 야스퍼스는 "좋은 게임이었다. 그리고 당신은 좋은 선수였다. 내겐 힘든 경기였고 항상 결승전은 힘들었다. 나도 최선을 다한 경기였다"고 말해 낙담하고 있는 황봉주의 기를 살리려 했다.
야스퍼스는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오열한 황봉주에 대해 "그의 감정을 잘 알고 있다. 30년 전 내 모습을 보는 듯 했다. 1992년 두 번째 월드컵 결승(5전3선승제)에서 토브욘 블롬달(스웨덴)과 만났다. 그런데 1~2세를 이기고도 졌다. 심지어 5세트에서 월등히 앞서 있었는데 블롬달이 막판 13점을 쳐서 졌다"면서 "안에서 뭔가 잘못돼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감수성이 풍부한 선수다. 안됐을 때 마음, 그런 마음이 아니겠나"라고 위로했다.
이어 그는 "경험이 쌓일 것이다. 나도 이기고 싶은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이해한다"면서 "황봉주는 정말 존경스러운 선수다. 스스로 자랑스러워 해도 된다. 나는 경기 전에 그가 누군지도 몰랐다. 심지어 같은 조가 아니어서 이후에도 몰랐다. 하지만 대회를 치르면서 그를 알게 됐다"고 강조, 황봉주의 플레이가 인상적이었다는 사실을 설명했다.
![[사진]파이브앤식스 제공](https://file.osen.co.kr/article/2021/07/19/202107190115779916_60f45551b2c90_1024x.jpg)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황봉주
황봉주는 대회 내내 '실핀'으로 화제였다. 자세를 취할 때 앞머리가 시야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아무 생각 없이 실핀을 꽂은 것이 조금씩 팬들에게 어필했다. 이후 축구선수를 꿈꿨지만 생활고 때문에 미용사로 전업한 배경을 지닌 선수, 무뚝뚝한 표정이 앙징 맞은 실핀과 묘한 대조를 이룬 황봉주는 김진아(성남)와 '성대결'에서 패한 선수이기도 했다. 여기에 정상적이지 않게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자세도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황봉주는 32강을 통과하고 16강까지 넘어서며 차츰 인정을 받았다. 김행직(전남), 최성원(부산시체육회), 허정한(경남)이 모두 탈락한 가운데 김준태(경북)와 단둘만 8강 무대까지 오르며 기대감을 모았다. 특히 긴박한 순간에도 과감하게 수로 허를 찔렀고 절박한 순간에도 덤덤한 표정은 신뢰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설마했던 동료들도 날이 갈수록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는 황봉주를 응원하고 나섰다.
황봉주는 무엇보다 멘탈적인 면에서 장점을 지녔다. 인생의 굴곡을 견뎌내면서 당구선수가 천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돈을 벌기 위해 잠깐잠깐 한눈을 판 것이 오히려 당구에 대한 신념을 더욱 굳게 만들었다. 스스로 정한 루틴을 2년 가까이 지켜오면서 내공을 키우고 있다.
황봉주는 "좀더 일찍 당구에 집중했다면 하는 후회를 한다"면서 "옛날 내가 당구를 좀 칠 때 왜 그렇게 건방졌지 모르겠다. 지금은 당구를 칠 때마다 항상 겸손해진다. 매번 당구를 칠 때마다 가야할 길이 멀구나라는 생각만 든다"고 말하고 있다. 국내 대회서도 경험하지 못한 결승 무대를 처음 출전했던 국제 대회서 덜컥 신고한 황봉주의 저력. 운이 아니라 실력으로 자리할 것이란 기대감이 피어오르고 있다. /letmeout@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