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감한 투자와 과학적인 육성이 어우러져야 국제무대에서 성적을 낼 수 있다. 사상 첫 올림픽 은메달을 딴 일본여자농구가 준 교훈이다.
일본여자농구대표팀은 8일 사이타마 슈퍼아레나에서 개최된 ‘2020 도쿄올림픽 여자농구 결승전’에서 미국과 선전 끝에 75-90으로 패했다. 일본은 사상 첫 올림픽 은메달을 수확하는 쾌거를 달성했다.
농구는 신장이 아니라 심장의 크기가 중요하다는 앨런 아이버슨의 명언이 떠오른 경기였다. 평균신장이 176cm에 불과한 일본은 자신보다 10cm가 큰 미국을 정확한 슈팅과 다양한 전술, 끈끈한 조직력으로 끝까지 괴롭혔다. WNBA에서 뛰는 최장신센터 도카시키 라무(192cm)가 무릎십자인대 파열로 시즌아웃된 상황에서도 일본은 가진 실력의 200%를 발휘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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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대표팀을 지휘한 포인트가드 마치다 루이는 올림픽 베스트5에 이름을 올렸다. 마치다 루이는 불과 162cm의 신장으로 경기당 12.5개의 어시스트를 뿌렸다. 2위 줄리 앨리만드(벨기에)의 7.5개보다 무려 5개나 많은 수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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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폭적인 지원+과학적인 훈련=아시아를 초월한 일본
일본농구의 성공은 단순한 기적이 아닌 투자와 노력의 결실이다. 종전까지 일본여자농구는 올림픽 출전 자체가 4회에 불과했고, 최고성적도 8강에 그쳤다. 일본은 1984년 LA 올림픽 은메달, 2000년 시드니 올림픽 4위, 2007년 아시아선수권 우승의 한국에 비해 확실히 뒤쳐져 있었다.
한국농구가 퇴보하는 사이 순식간에 상황은 역전됐다. 일본농구협회는 2010년대 중반부터 도쿄올림픽을 바라보고 남녀대표팀 혁신 프로젝트를 착실하게 진행했다. 대기업에게 수백억 원의 금전지원을 받았고, 단계별 대표팀 육성, 미국농구유학 지원 등의 유망주 발굴 프로그램을 장기적으로 진행했다.
인프라도 훌륭했다. 각급 대표팀 3팀이 동시에 훈련을 할 수 있는 전용체육관 시설 ‘내셔널 트레이닝 센터’도 문을 열었다. 국제대회가 없어도 대표팀을 상시 소집해 훈련을 실시했다. 선수들이 대표팀에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최고의 용품과 시설을 지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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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농구 습득에도 적극적이었다. 일본농구협회는 2017년 톰 호바스 감독을 여자농구대표팀에 사령탑으로 임명했다. 현역시절 NBA선수로 활약했고, 2010년부터 일본프로농구에서 지도자생활을 한 인물이다. 협회는 대표팀 선수선발과 훈련에도 감독에게 전권을 부여해 잡음을 없앴다.
일본은 미국과 유럽으로 전지훈련을 실시해 미국대표팀 및 유럽강호와 평가전을 갖는 등 한국농구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파격적인 육성을 했다. 혼혈선수를 적극 받아들이는 등 실력만 있다면 대표선수 선발에 아무런 차별을 두지 않았다. 그 결과 일본여자농구는 2017년과 2019년 아시아컵을 연속 제패하며 아시아 최고로 올라섰다.
아시아 최고에 만족하지 않은 일본은 꾸준히 세계무대를 노크했고, 도쿄올림픽 은메달이라는 값진 성과를 거뒀다. 세계최강 미국을 상대로 감히 주눅들지 않고 경기하는 일본선수들의 모습은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전임감독조차 없는 한국, 올림픽 출전자체가 기적이다
한국농구는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하고 퇴보하고 있다. 갈수록 줄어드는 선수풀로 아마농구는 고사되고 있다. 선수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 투혼을 발휘하고 있지만, 농구협회의 시스템이 받쳐주지 않는다.
지난해 2월 한국은 올림픽 최종예선에서 1승2패로 본선 티켓을 획득했다. 하지만 이문규 감독은 영국전 승리 후 “선수들 정신력이 나태해 역전을 허용할 뻔했다”는 인터뷰로 혹사논란을 키웠다. 전술, 전략보다 선수들 정신력을 강조하는 80년대 사고방식이었다. 결국 이 감독은 올림픽 본선행에 성공하고도 대표팀 감독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도쿄올림픽 1년 연기로 감독직은 1년 가까이 공석이었다. 결국 지난 1월에야 전주원 감독과 이미선 코치가 대표팀을 맡았다. 코로나 사태와 WNBA 박지수의 늦은 합류, WKBL 파이널 MVP 김한별의 부상낙마 등 악재까지 겹쳤다. WKBL 시즌이 끝나고 겨우 소집된 대표팀은 국내서 제대로 손발을 맞춰보지도 못하고 도쿄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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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좋은 성적을 기대하기는 무리인 환경이었다. 한국여자농구가 2008년 베이징올림픽 이후 13년 만에 올림픽 본선에 갔다는 사실에 만족해야 했다. 전주원 감독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기적을 연출했다. 한국은 지난해 37점차로 패했던 스페인과 1차전서 69-73, 4점차 접전을 펼쳤다.
한국은 세르비아와 예선 마지막 경기서 경기 시작 후 7분 10초 동안 단 3점에 그쳤다. 하지만 한국은 막판 맹추격으로 61-65로 아쉽게 패하는 투혼을 발휘했다. 17점을 몰아넣은 박지현 등이 뒤늦게 몸이 풀렸다. 국제대회 경험은커녕 국내서 제대로 된 연습경기조차 치르지 못하고 나간 것이 치명적이었다.
경기 후 의견을 나눈 일본기자는 “한국선수들은 일본선수들보다 재능이 더 좋은데 지원이 받쳐주지 못해 성적을 못 내는 것 같다”며 한국대표팀에 안타까움을 내비쳤다.
멀리 일본농구까지 갈 것도 없다. 한국여자배구 역시 스테파노 라바리니 감독을 영입하고, 김연경이라는 세계적인 스타를 배출하며 올림픽 4강의 신화를 썼다. 배구협회는 라바리니 감독에게 2022년까지 감독직 연장을 제시했다. 선수들에게 김치찌개 회식을 시킨 배구협회가 그래도 농구협회보다는 훨씬 능력이 낫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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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른 전주원 감독의 노하우는 다음 대표팀에 전해지지 않는다. 농구협회는 또 다시 공모를 통해 오는 9월 아시아컵에서 여자농구대표팀을 이끌 감독을 선임할 예정이다. 답답한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 / jasonseo34@osen.co.kr
2021/08/09 ⓒGettyimages(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