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재동 객원기자] 매일매일 확인한다. 내가 꿈꿔왔던 나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루하루가 지옥이다. 나 혼자만이면 억울해서 “선생님의 일상도 내 것처럼 지옥이길 기도합니다”는 악플을 남긴다.
jtbc 10주년 기념 특별기획드라마 <인간실격>(허진호 연출, 김지혜 극본)의 여주인공 부정(전도연 분)은 악플러다. 좋은 작가가 되고 싶었던 대필 작가였고 현재는 일용직 가사도우미이기도 하다. 유산 경험도 있고 조울증도 있다. 부정은 부정한다. “이 삶은 내가 원했던 삶이 아냐.”
<인간실격>은 1997년 <8월의 크리스마스>부터 메가폰을 잡은 베테랑 영화감독 허진호의 첫 드라마 연출작이다. 그 때문인지 부분부분 영화적 기법이 차용되며 신선함을 선물한다.
특히 드라마의 전유물인 대사 대신, 집요하게 따라붙는 호흡 긴 카메라워크로 섬세하고 내밀한 인물들의 감정선을 잡아내 눈길을 끈다.
이런 카메라의 시선을 ‘부정 역’ 전도연이나 ‘강재 역’ 류준열은 어색함 없이 받아넘긴다.
드라마는 강재를 비추면서 부정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마지막으로 선생님을 만나고 온 그날부터 저는 인간의 자격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기 이름 걸고 세상을 판단하고 분노하고 절망할 자격. 선생님에겐 있고 제게는 없는 그 자격에 대해서요.”
화면은 독백이 흐르는 동안 역할대행 서비스업자로서 여자고객을 응대하는 생각없는 표정의 류준열을 담아낸다. 화면밖에서 독백하는 부정이나 화면속에서 움직이는 강재나 누군가에게 있는 인간의 자격은 갖추지 못한 모양이다.

그런 부정과 강재의 세상나기는 결이 판이하다.
부정은 자격지심을 가시처럼 곧추세우고 매사를 예민하게 받아들인다. 스치듯 지나치는 타인의 시선, 몸짓, 뒷담화에 상처받고 그 상처를 속 깊이 고름처럼 끌어안고 산다. 때문에 이것저것 자질구레한 고통들에 뒤엉킨 채 삶의 나락으로 굴러떨어지기 직전의 위기에 놓인다. 아니 악플로 인한 경찰의 출두요청서까지 받았으니 내리막을 구르기 시작한 셈이다.
이에 반해 강재는 표피적으로 산다. 돈 떼먹고 잠적한 아는 형은 강재에게 당연히 ‘그 새끼’였고 그가 자살했다는 얘길 듣고는 다시 ‘정우형’이 됐다. 상주없는 빈소를 지키며 본인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그냥 창피한 주접일뿐 그 정체를 알려고도 않는다.
확실히 둘 모두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캐릭터다. 한명은 스스로 굴을 파고 들어가며 소외를 자처하고 다른 하나는 소외된 줄도 모른 채 물에 뜬 기름처럼 세상을 겉돈다.
시놉시스상 부정은 ‘결국 아무것도 되지 못한 채 길을 잃은 여자’로, 강재는 ‘결국 아무것도 못 될 것 같은 자기 자신이 두려워진 남자’로 설정돼있다.
여자는 세상과의 연을 놓지않기 위해 악플을 쓰고 남자는 노력하면 세상과 섞이려니 부나비 몸짓을 이어간다.
부정의 도피처는 아버지 창숙(박인환 분)이다. 폐지를 줍지만 언제나 삶을 긍정하고 사람에 대한 연민을 놓지않은 인물이다. “나도 폐지나 주을까?”라고 묻는 부정에게 “너는 자식이잖어. 자식은 부모보단 잘살아야지”라고 위로를 건네주는 존재. 그런 창숙이 사는 곳엔 강재도 함께 산다. 창숙을 만나고 돌아오는 버스안. 조울증으로 인해 남 이목 상관없이 통곡하는 부정을 불편하게 지켜보던 강재가 건넨 손수건이 두 사람을 잇는다. 내리려는 강재를 붙잡고마는 부정의 간절한 눈빛과 어색하고 불편하게 바라보는 강재의 시선이 마주치며 1회가 끝났다.
소소한 에피소드 속에 사랑과 인생을 담는데 능란한 감독 허진호와 독보적 연기력의 전도연·류준열이 만들어낼 우리 사는 이야기가 이 가을 어떤 위로를 전해줄지 기대된다.
낙엽 몇 닢 졌다고 겨울이 온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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