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마저 그리운 전도연, 덜미 잡아챈 류준열 [김재동의 나무와 숲]
OSEN 김재동 기자
발행 2021.09.06 09: 02

[OSEN=김재동 객원기자] JTBC 10주년 특별기획 토일드라마 <인간실격>이 5일 2회 방영분부터 급물살을 탔다. 이날 드라마의 두 주인공 부정(전도연 분)과 강재(류준열 분)는 부정이 투신하려던 건물 옥상에서 재회했다. 이 장면을 소설로 각색해보았다.
“어떻게 알았어요? 나 죽고 싶은지..너무나 창피해서 당장이라도 죽고 싶어. 당신 때문에 직장 잃고 아이 잃고 나를 잃었어!”
여자의 절규가 비상계단 문을 뚫고 강재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강재는 걸음을 멈췄다. 어디서 들어본듯한 목소리. 그는 분명히 이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강재는 소리없이 문을 열고 비상계단을 내려다봤다.

여자는 거기 있었다. 문을 등진 채 계단 중간에 자그맣게 앉아있었다. 그녀였다. 그녀는 얼마전 버스정류장에서도 비슷하게 오열했다. “아부지 나 결국 아무것도 못됐어요...세상에 태어나서 아무것도 못됐어...나 어떡해 아부지. 난 자격이 없어.”정류장 불빛이 환해선가? 어둠 속에서 지켜보는 강재에게 그녀의 울음 우는 소리는 한없이 창백했고 처연했다. 고막을 통해 곧장 심장을 찌르는 예리함도 있었다. ‘나는 뭔가가 돼 있나?’ ‘나는 자격이 있나?’
여자는 같이 탄 버스 안에서도 대책없이 울었다. 강재는 그 모습이 불편해 350달러짜리 손수건을 건넸었다. 그때 여자는 손수건 값으로 5만원을 건네며 거스름 돈을 요구했었다. 무려 350달러짜리 손수건에 코까지 풀어놓고선. 강재는 당시 그 난감한 상황을 “손수건은 내 성의, 5만원은 그쪽 성의”란 말로 정리한 바 있다.
우연한 만남였지만 어쨌거나 여자로 인해 강재는 생각이란 것을 하기 시작했다. 여자가 그녀의 아버지에게 하소연했듯 자신도 말 걸 사람이 필요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끌어들이기로 했다.
“결국 세상에서 나를 제일 사랑한 사람은 나한테 돈을 제일 많이 쓴 사람이 아닐까요? 돈이 있었다면 나에게 줬을 사랑하는 아버지! 돈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거는 완전히 잘못된 걸까요? 인간답게 사는 일에 실패해버린 걸까요?..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아직 아무 것도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생각을 시작하며 강재는 스스로 대견함을 느꼈다. 지금은 다소 유치하더라도 생각을 계속 하다보면 좀 더 그럴싸해지리라. 그러다보면 마침내 무언가가 돼 있고 자격도 생기겠지.
여자의 어깨가 떨린다. 눈으로도, 가슴으로도 그 가녀린 떨림이 전해져왔다. 강재는 생각했다.‘저 여자 위태롭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고작 손수건 건넨 인연만으로 그 심각한 상황에 발을 들이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행히 여자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당신한테 맞은 진단서도 있고, 세상이 모르는 당신 이야기를 알고 있어. 당신 쉴드 해제야!”
강재는 가볍게 안도하며 슬그머니 문을 닫고 돌아섰다. 저렇게 전화 상대방을 벼르는 것으로 보아 당장 무슨 일을 벌일 것 같지는 않았다.
강재의 뒤로 문이 닫혔을 때 여자의 전화벨이 울렸다. 이어 계단을 뛰어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전화기는 같은 자리에서 계속 울고.. 다시 되돌아간 자리, 여자는 없고 휴대폰만 벨소리를 토해내고 있었다.
강재가 옥상을 올랐을 때 여자는 난간을 부여잡은 채 뛰어볼 엄두를 내려고 용기를 쥐어짜고 있는 듯 보였다. 강재는 무심결에 소리쳤다. “죽기는 왜 죽습니까?”
부정은 갑자기 뒤에서 터져나온 남자의 외침에 놀라 뒤돌아보았다. 그 남자였다. 부정을 투명인간 보듯했던 남자. 조울증에 휘둘려 남 이목 생각 안하고 버스안에서 한바탕 울음을 터뜨렸던 민망한 순간, 손수건을 건넨 남자. 그리고는 5만원을 손수건 값으로 갈취해간 남자. 그가 여긴 또 왜?
부정의 글을 표절하고 부정의 인생을 망가뜨린 작가 정아란에게 선전포고를 했을 때 부정이 이기길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조차 바라지 않았다. 이기자는 게 아니었다. 단지 숨을 좀 쉬고 싶었을 뿐이었다.
정아란의 진심어린 사과면 어찌어찌 숨통 트고 살만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부정이 자신의 사과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단정했다. 그 모멸감, 정당한 사과조차 받지못할 인간실격의 굴레가 부정을 질식시켰다. 사는 게 죽도록 끔찍해서 죽음마저 그리울 지경이었다.
정아란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에 부정은 안간힘을 끌어올려 맞받아쳤다. 전력을 다해 당신을 망가뜨리겠노라고. 하지만 다시 걸려온 정아란의 전화에 소스라쳐 휴대폰을 떨구고 말았다. 죽을 힘을 다할 수 있었던 건 한번 뿐이었다. 그녀가 뱉은 독설은 그저 안개속에 뿜어진 입김에 불과했다.
정아란의 이름이 반짝이는 액정을 보며 그제서야 부정은 깨달았다. 그녀는 결코 저 뻔뻔하게 빛나는 이름을 꺾을 수 없을 것이다. 다시 한번 죽을 힘을 다 쓴다해도 저 철면피함을 꺾을 만한 내면의 독기를 끌어낼 순 없을 것이다. 그렇다. 결국 살아서는 이 지옥을 끝장낼 수 없는 것이다.
옥상에서 내려다본 지상은 공포였다. 그것은 살아있는 것의 어찌할 수 없는 숙명. 인간의 자격을 박탈당했을 지라도 벗어날 수 없는 또 다른 굴레였다. 처절하게 죽고 싶으면서 또 간절하게 살고 싶은..
그리고 웬 남자가 외쳐줬다. “죽기는 왜 죽습니까?”순간 부정은 자포자기의 격정에, 또 임박한 죽음에 대한 공포에 막혔던 숨통이 한순간 터져나감을 느꼈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 아직 난 살고싶은 거구나!’
부정이 돌아본 자리, 거기에 그가 서있었다. 버스안에서 손수건을 건네 눈물을 닦아주었던 그 남자. 이 남자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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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인간실격' 방송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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