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재동 객원기자] 먹지도 자지도 않는다. 당연히 씻지도 감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노숙자는 아니다. 집도 있고 통장 두 개에 100만 원 좀 넘는 은행 잔고도 있다.
그렇다고 집 밖으로 나선 그녀를 딱히 노숙자와 따로 구분 지을 이유도 없다. 그녀의 머리 주위를 트랙 삼아 뱅뱅 도는 파리를 보면 더욱 그렇다.
다행인 건 그녀가 밖에 나갈 일 없는 방구석 폐인이란 점. 그녀에게 필요한 건 버퍼링 잦은 컴퓨터로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약간의 전기와 맥주 캔 정도 뿐이다.
‘산소같은 여자’ 이영애가 맡은 JTBC 토일드라마 ‘구경이’의 타이틀 롤은 그런 캐릭터로 출발한다. “너나 잘 하세요” 하던 ‘친절한 금자씨’ 당시의 생경함이 오버랩된다.
NT생명 조사 B팀장 나제희(곽선영 분)는 실적 부진으로 팀 해체 위기에 처하자 경찰 시절부터 선배인 구경이에게 SOS를 청한다. 12억의 생명보험료를 남기고 시신없는 죽음 상태가 된 어느 남편의 사례가 조작임만 증명되면 팀은 무사할 수 있다. 나제희는 버퍼링 없이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최신형 컴퓨터를 미끼로 방구석 폐인을 통영까지 끌어내린다. 동행은 구경이의 오랜 게임 파티원 산타(백성철 분). 운전면허 있고 시간 많은 백수인 것이 선발 이유다.
구경이의 수사방식은 당연한 걸 의심스럽게 보는데서 출발한다. 그래서 찾아낸 실종 남편 김민규(김강현). 하지만 그는 구경이를 피해 숨어든 은신처에서 황화수소에 질식돼 사망한다. 사망 순간의 목격자는 구경이.
누군가에게 이용당한 더러운 기분에 좀 캐보니 단순 보험 사기사건에서 엉뚱하게 연쇄 살인의 악취가 물씬 풍긴다. 김민규 이전에 그가 동참했던 선상회식장소에 함께 했던 직장동료들이 모두 사고사나 자살했다. 구경이는 이 부지런한(?) 살인범의 존재를 감잡고 살해동기가 해변에 떠밀려온 한 청년의 익사체와 관계 있음을 눈치챈다.

구경이의 추리대로 익사체는 송이경(김혜준 분)의 조력자 건욱(이홍내 분)의 소년원 후배다. 선상 회식 중 바다에 빠지기 전 건욱에게 문자를 보낸 것이 송이경으로 하여금 연쇄살인에 나서게 한 이유였다.
연극에 열성이지만 실력은 못미치는 연극배우 송이경은 연극보다 사람 죽이는 일에 더욱 진심인 싸이코패스다. “딸기 케잌 먹고싶다” 정도의 기분으로 “사람 죽이고 싶다”고 말할 정도다. 그래도 원칙은 있어서 나쁜 놈만 죽인다. 나름 사회에 기여하는 방식이다. 살해 흔적 없이 사고사나 자살로 위장하는 솜씨가 빼어나 경찰의 용의선상에 오른 바가 일절 없다.
구경이와 송이경은 구면이다. 송이경은 여고시절 연극반 친구들이 애지중지하던 고양이 새끼들을 죽인 수위 아저씨를 상대로 살해를 시도했다. 미수에 그친 그 사건 당시 수사관으로 등장했던 게 구경이다. 더욱이 그녀는 연극반 지도교사 장성우(최영준 분)의 아내였다.
당시 여자수사관 구경이에게 진한 호기심을 가졌던 송이경은 보험설계사인 이모 정연(배혜선 분)이 장난친 의료보험사안을 조사하던 구경이와 다시 마주한다. 그리고 구경이가 던진 “근데 너 왜 아는 척 안하니?”란 한 마디에 천적을 마주한듯한 긴장과 스릴을 느낀다.
구경이가 방구석 폐인된 사연도 나왔다. 남편의 제자가 익사한 후 그녀와 남편 사이의 불미스런 소문이 퍼졌고 그 소문에 구경이마저 남편을 의심했으며 이후 남편은 자살하고 만다. 그리고 남편마저 못믿어준 스스로의 의심병을 구경이는 아직도 용서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의문의 인물 용숙(김해숙)도 등장한다. 봉사기부재단 이사장이란 타이틀을 갖고 있으며 느닷없이 구경이를 대중목욕탕으로 납치하듯 불러 연쇄살인범을 잡자고 제안한다. 그녀는 불상의 연쇄살인범을 ‘케이’라 부르며 구경이를 지원하는 의미로 NT생명 조사 B팀을 사(?)주기로 했다. 연쇄살인범 송이경을 케이라 부르는 그녀의 의도가 무엇인 지는 앞으로 지켜볼 일이다.

드라마 ‘구경이’는 알기 쉬워 반갑다. 드라마 초반부에 주인공의 사연과 안타고니스트의 정체를 다 밝히고 시작했다. 최근 방영된 스릴러물들이 반전을 겨냥, 초반을 복잡하고 모호하게 시작하는 것과는 스탠스가 다르다.
‘더 로드: 1의 비극’부터 ‘홈타운’·‘검은 태양’·‘너와 닮은 사람’·‘하이클래스’·‘지리산’ 등이 초반 복잡한 설정들을 장치, 시청자들의 이해력을 시험한 것과는 판이하다. 보면 보는대로 이해되는 친절한 스토리 전개는 시청자들과의 무리없는 소통이란 점에서 드라마 ‘구경이’가 갖는 큰 장점이다. 극 진행 도중 시청자 이해를 돕는 연극무대 같은 해설 장치를 삽입한 것도 참신하다.
무엇보다 타이틀롤의 캐릭터가 개성적이다. 이영애는 노숙자 컨셉으로 ‘친절한 금자씨’에서와 같은 파격을 선보이는가 하면, 경찰 정복 차림으로 송이경과 만날 땐 ‘공동경비구역 JSA’의 중립국 법무관 소피 장 소령을 연상시키는 단정함을 내비쳐 극 진행을 통해 극과 극의 개성을 연기할 것을 예고했다.
이영애는 ‘대장금’ 캐릭터와 ‘산소같은 여자’ 이미지가 강해서 그렇지, 금자씨뿐 아니라 ‘내가 사는 이유’의 술집 작부 정애숙, ‘서궁’의 악녀 김개시를 성공적으로 소화했을만큼 연기 스펙트럼이 넓다. ‘구경이’ 역시 충분히 기대되는 이유다.
송이경 역을 맡은 김혜준도 눈길을 끈다. 그녀가 연기하는 ‘천진한 싸이코패스’는 흔치 않은 캐릭터다. 친구들과 깔깔대고 이모에게 어리광 부리면서 딱 그런 기분으로 사람까지 죽이는 김혜준의 캐릭터 분석은 발군이다. 너무 스스럼 없는 바람에 한 템포 늦게 찾아오는 섬뜩함이 오히려 소름을 유발한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전도연(인간실격)·고현정(너를 닮은 사람)·전지현(지리산)에 이어 복귀한 이영애다. 세월이 빗겨간 외모로 세월을 아로새긴 연륜의 연기를 펼치는 여배우라면 언제든 환영이다. 이영애는 과연 구경이 캐릭터를 어떻게 완성해 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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