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모’ 하경과 소은의 원망할 곳 없는 순애보 ‘애절’ [김재동의 나무와 숲]
OSEN 김재동 기자
발행 2021.12.08 10: 39

[OSEN=김재동 객원기자]  민들레 홀씨처럼 표표히 날아온 정(情)하나가 제 멋대로 가슴 속에 심어지더니 한 번 두 번 돌아만 봤을 뿐인데도 온 가슴 가득 차도록 커져 버렸다.
제가 날려 보낸 것도 아니라서 저를 원망할 수도, 내가 날아 오라고 부른 것도 아니어서 나를 원망할 수도 없건만 제 멋대로 날아와 제 멋대로 커져 버린 정이란 놈은 제 멋대로 빨갛고 퍼렇게 멍이 들더니 종내는 온 가슴을 비척비척 시들이고 만다.
KBS2 월화드라마 ‘연모’ 속 비련의 여인 둘의 안타까운 사정이 심금을 울린다. 중전 노하경(정채연 분)과 신소은(배윤경 분)이다.

중전으로 간택되었을 때 하경은 기뻤다. 온 나라에서 가장 귀한 여인이 된 것보다 자신의 낭군이 어느 날 문득 넘어질뻔한 자신을 보듬어 주었던 바로 그 남정네였기 때문이다. 그 품에 안겨 올려다 본 세자 이휘(박은빈 분)는 얼마나 관옥 같았던가. 준수한 콧날에 가을 호수같이 서늘한 눈매, 연지가 묻어날듯한 붉은 입술까지.. 소녀 하경의 사랑은 그때 시작되어 버렸다.
한순간 온 세상을 다 갖은 듯한 충만함의 감미는 그러나 하루 하루 퇴색되어갔다. 왕은, 그녀의 첫사랑은,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꽃을 따다 바치는 애교도, 칭얼대는 응석도 어쩐지 어색하고 난감해하는 응대로 돌아왔다. ‘아, 그이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깨달아가는 시간들은 그 얼마나 모질었던가.
마침내 궐에 도는 불온한 소문이 그녀의 귀에도 들어왔다. ‘왕은 남자인 주서 정지운(로운 분)을 연모한다.’ 청천벽력이었다. 아닐 것이다. 아닐 것이다. 되뇌어본들 불안은 나날이 작은 가슴을 채워나갔다. 결국 정지운을 불러 궁을 나갈 것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녀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한때 사랑의 완결자로 스스로 충만했던 하경은 어느덧 사랑을 구걸도 못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다만 그저 국모로서, 왕비로서 국본만 잉태하게 해달라고 왕 이휘에게 사정 해야하는 비련만 남았다.
그런 그녀를 왕은 그제서야 안아준다. 그리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친절했지만 그녀를 더욱 낙담시킨다. “언젠가 중전께는, 중전에게만은 모든 것을 말하리라”라니. 결국 그 소망마저 이뤄줄 수 없단 말 아닌가. 모질고도 모질구나 잔인한 이여! 그 원망스런 처연한 기색으로, 그 한스런 다정한 목소리로 어찌 그리 가차없이 여린 가슴을 헤집는가.
한편 정략적으로 한기재(윤재문 분) 견제에 신영수(박원상 분)가 필요하다는 혜종(이필모 분)의 조언에 따라 세자 이휘가 혼담을 들고 찾아왔을 때 소은은 단호했다. “세자빈이 될 생각 없다. 따로 가슴에 둔 이가 있다” 고.
그녀가 가슴에 품은 이는 바로 정지운이었다. 악연으로 만나 티격태격했던 사이. 클리셰대로라면 티격태격은 시나브로 호호하하가 돼야 됐다. 소은은 그래서 호호하는데 지운은 묵묵부답이다.
나름 한 미모 한다 생각했는데. 아버지가 당대 권신 한기재마저 전전긍긍하는 청백리 신영수인데. 내가 어때서? 강제된 현실 자각을 통해 좀 더 겸손해봐도, 좀 더 관대해봐도 지운이 소 닭 보듯이 하는 데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들려오는 소문 ‘지운은 왕의 남자다!’
아닐 것이다. 그럴 리 없다. 자기 최면이 절정에 달할 무렵 내금위장 정석조(배수빈 분)가 신영수를 찾아 혼담을 넣는다. ‘그럼 그렇지!’ 정적이 건넨 혼담에 난감해하는 아버지 신영수에게 소은은 분명히 말한다. “이 혼사 하고 싶습니다.”
혼담이 진행 중이건 말건 지운이 소은을 바라보는 건조한 시선은 바뀌지 않는다. 어디서 뭘하고 돌아다니는지 칼맞고 돌아온 지운을 날밤 새서 간병하는 중 비몽사몽 털어놓은 지운의 속내 “전하 옆에 같이 있고 싶습니다.”
‘이런 남자였어? 아, 내가 은애했던 남자는 이런 남자구나!’ 그가 바라기 하는 상대가 같은 여인이라면 여지는 있을 것이다. 미모로, 애교로, 정실부인의 권위로 한껏 싸워볼만하다. 그런데 남자라니, 왕이라니, 그런 취향이라니.
결국 왕이 여자라는 사연은 밝혀질 것이다. 그렇다고 이 두 여자가 사랑을 획득할 가망은 없다. 이휘와 지운의 사랑은 세월로도 이겨낼 수 없고 그 간의 사연으로도 따라잡을 수 없이 깊다. 무엇보다 지들끼리 좋아하는 맘을 한번도 고쳐먹어본 적이 없다. 한기재의 칼이 날아오더라도 ‘우리 사랑하며 죽을래’ 할 판이다.
이휘랑 정지운은 좋겠다. 죽어도 좋을만큼 사랑해서. 하경과 소은의 인생에 사랑은 종쳤다. 국모가, 세자비 간택에 오른데 이어 혼담까지 오간 사대부 여식이 새 사랑 찾을 길은 없다. 그저 자신들이 좋아했던 남자들이 남자 취향이 아니었단 사실만이 위로가 될 수 있을까.
누가 뭐래도 ‘연모’의 최대 피해자는 하경과 소은이다. 이휘랑 정지운을 원망할 건덕지도 없어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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