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재동 객원기자] “펜싱에서 제일 중요한게 거리조절이거든. 지금 내가 그걸 못하네. 내가 너무 많이 기대했다. 고유림한테도 너한테도.”
19일 방영된 tvN 토일드라마 ‘스물 다섯, 스물 하나’ 3부에서 나희도(김태리 분)가 백이진(남주혁 분)에게 한 말이다.
어디 펜싱뿐일까. 사람이 산다는 게 남과 더불어 산다는 의미인 바에야 사람 간의 거리 조절은 살면서 가장 중요한 일일 수 있다.
나희도에게 고유림(보나 분)은 스타였다. 선망과 동경의 대상였다. 매주 토요일이면 고유림의 태양고를 찾아 연습하는 고유림을 바라보는 걸 낙으로 여겼고, 간 김에 고유림 어머니가 운영하는 분식집에서 떡볶이와 순대를 즐겼다. 내리는 비 앞에서 난감해하는 고유림 앞으로 몰래 우산을 떨궈주고 “고마워 잘 쓸게”란 고유림의 메아리를 저 혼자 되새기며 저 젖는 줄 모르고 옥상에서 덩실덩실 춤도 췄었다.
그 팬심은 태양고로 전학와 고유림과 한솥밥을 먹으며 산산이 부서졌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유림의 적의 앞에 희도는 절망을 느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있잖아. 너 진짜 좋아하고 동경했거든. 딱 그만큼 이제 미워할 수 있을 거 같아”라는 선언을 전한다.
나희도에 대해 고유림이 보이는 적의의 정체는 백이진과의 대화에서 찾아진다. “나 걔 싫어. 불길해. 그러니까 오빠도 걔랑 친하게 지내지 마!”

고유림에게 나희도는 불길한 존재다. 어린 시절 고유림은 펜싱 신동 나희도에게 패한 전력이 있다. 당시 시상대 위의 희도는 빛났고 단상 밑에서 지켜보는 유림은 부러웠다. 그때만 해도 나희도는 고유림 앞에 우뚝한 벽이었다. 상황은 역전됐지만 고유림의 무의식 속엔 그런 나희도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언젠가 또다시 자신의 앞을 가로막을 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희도를 밀어내는 이유, 희도를 불길하게 느끼는 이유일 것이다.
열 여덟, 아직 미숙한 나희도나 고유림이나 그렇게 서로 간의 거리 조절에 실패했다.
‘복 짓는 마음이 죄 짓는 마음 된다’는 말이 있다. 좋아해서 베풀고 잘해주고 하지만 그 마음이 원망으로 돌변할 땐 그 진폭이 더 커진다. 흔한 부모들의 대사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가 단적인 예다. 설마 키우면서 앞날의 보상까지야 기대했을까.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었을테지만 어느 날 서운함이 몰려오면 자신의 희생을 곱씹게 되고 원망도 커지기 십상이다.
심심찮게 보이는 스타를 향한 빗나간 팬심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딱 좋아한만큼만 미워하겠다’는 나희도에게선 나이를 웃자란 성숙함마저 엿보인다.
‘청춘’을 다룬 드라마답게 희망도 안겨준다. 어렵사리 이진을 찾아온 아버지를 빚쟁이로 오인한 희도는 이진을 숨겨 부자상봉을 무산시킨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바로잡으려 슬리퍼만 신고 남의 동네까지 두시간을 헤메다 이진을 만나고서야 멈춘다. 그리고 어디 있는 줄 알고 그렇게 찾았냐는 이진에게 답한다. “찾지 않으면 찾을 수 없잖아.”

실수는 청춘의 특권이다. 희도 표현 ‘되게 똑똑한’ 이진이 터미널로 직행해 아버지를 만난 것과 달리, 방향도 모르면서 슬리퍼가 끊어지도록 헤매서라도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희도의 노력과 열정도 청춘의 특권이다.
운좋게 국가대표 평가전에 진출하게 된 희도가 특훈을 부탁했을 때 양찬미(김혜은 분)가 한마디 한다. “꿈을 꿀 줄 아네.” 그렇다. 잃어버린 사람도, 꿈도 찾지 않으면 찾을 수 없다.
나희도만을 위한 개인지도에 고유림이 이유를 물었을 때도 양찬미는 말한다. 나희도가 부탁하더라고, 학생이 부탁하고 조언을 구하면 선생은 그에 부응해야 한다고. 어른이 바라보는 균형있는 인간관계의 일단이다.
3회 말미 나희도가 “내가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과 거리 조절에 실패했다. 그 애를 더 이상 좋아하지 못할 것 같다”고 고백했을 때 채팅 친구 인절미는 나희도가 온종일 듣고 싶었던 “그 애가 잘못했네”란 말을 해줬고 희도는 “그래도 너랑 거리조절은 성공인가 보다”고 기뻐한다. 그리고 그 인절미는 고유림이었다. 그렇게 둘 사이의 거리조절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한참 멀어졌으면 또 어떤가. 돌아올 시간 충분한 청춘인데.
풀하우스 신간에 만사 제치고 줄달음 쳐야 했던 나이, 백마 탄 왕자님을 꿈꾼 이유가 백마 때문이었음을 깨닫는 나이고 보면 친구사이 거리조절이 불가능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사족으로 IMF라는 시대가 펜싱부 폐부로 이어져 희도의 꿈을 빼앗고 같은 시대적 이유로 희도의 대표 평가전 출전이 가능해지는 아이러니와 끊어진 슬리퍼로 인해 희도와 이진이 2인3각으로 귀가하는 장면을 배치한 구성은 성장드라마다운 영리한 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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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tv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