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랭킹 72위, 세계랭킹 304위. 당구 전문 선수가 내세우기엔 조금 아쉬운 성적이다. 하지만 동료들은 오히려 "그 정도도 대단한 성적"이라고 칭찬일색이다. 병원에서 행정일을 보면서 꾸준하게 전문 선수로 꾸준하게 대회에 출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업종도 아닌데 이렇게 힘든 두마리 토끼 사냥을 벌써 5년째 해내고 있는 선수가 바로 정성택(41, 김포)이다. 2005년 서울대학교병원(SNUH)에 입사한 정성택은 2017년부터 선수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휴가를 아껴 두는가 하면 병원에 동호회를 만들어 대회를 열 정도로 열혈 선수다.
![[사진]정성택 제공](https://file.osen.co.kr/article/2022/02/20/202202202112777068_621236a574be0.jpg)
![[사진]파이브앤식스 제공](https://file.osen.co.kr/article/2022/02/20/202202202112777068_621236a53abf2.jpeg)
-당구를 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당구는 친구들과 가끔 4구를 치긴 했다. 하지만 크게 관심은 없었다. 그러다 2008년 우연히 TV에서 나오는 당구 장면을 멍하니 보게 됐다. 최성원 선수 경기 모습이었는 데 확 몰입이 됐다. 좀더 자주 당구를 접하기 위해 한달 동안 당구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왜 그런 것인가
▲뭐랄까. 최성원(부산시체육회) 선수는 좀 다르게 쳤다. 내가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끝까지 답을 구하고 문제풀이 정답을 알아내려는 좀 끈질긴 면이 있다. 수학, 물리 이런 과목을 좋아한다. 그런데 최성원 선수는 기존에 내가 생각했던 방식과는 다르게 쳤다. 그런 점이 끌렸다. 게다가 잘쳤다.
-그래서 어떻게 했나
▲이후 최성원 선수가 나오는 동영상을 찾아서 유료 결제를 통해 계속 봤다. 그러다 '아 저렇게 치는 거구나'하고 놀랐다. 나도 그렇게 쳐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4구 치던 시절이라 3쿠션이 신기하기도 했다. 그래서 따로 3쿠션을 배운 적이 없다. 종이에 그림을 그려 놓고 연구한 것을 직접 당구장에 가서 모르는 손님들에게 적용하기도 했다. 굳이 스승을 묻는다면 최성원 선수라고 할 수 있다. 영상 속 최성원 선수에게서 아우라가 보였다. 최성원 선수는 내 멘토라 할 수 있다.
-그 멘토(최성원)를 언제 실제 처음 만났나
▲한참 뒤였다. 2016년 내가 다니던 당구 동호회(나비)가 없어지면서 선수 등록을 권유 받았다. 2017년 등록을 한 뒤 대회에 나갔는데 단체전 경기에서 마침 상대로 만났다. 인사하고 열심히 쳤다. 항상 TV로만 봤던 이미지와는 달랐다.
-어떻게 달랐나
▲TV 속 최성원 선수는 상당히 무뚝뚝해 보였다. 그런데 막상 만나서 경기를 하는 데 톱 랭커임에도 매너 있게 대해줬다. 또 표정도 다정다감했다. 이후 최성원 선수가 쓰는 브랜드의 큐를 사서 썼다. 큐에 대해 최성원 선수에게 직접 묻고 싶은 것이 있어 직접 부산을 찾아가 물었다. 새벽 3시까지 개인 레슨을 해주시더라. 그날 처음 연락처를 주고 받았는데도 친절하게 대해줘서 더 감동이었다. 이후에도 먼저 인사해주고 해서 감동이었다. 지금은 '형', '동생'으로 부르며 친해졌다.
![[사진]정성택 제공](https://file.osen.co.kr/article/2022/02/20/202202202112777068_621236a5a51e5.jpg)
-지금은 멘토와 같은 소속팀(몰리나리)이 됐다
▲솔직히 꿈만 같다. 마땅한 성적도 없는 데 오성규 파이브앤식스 대표께서 권유해주셨다. 하지만 '성적보다 당구에 대한 마음가짐과 열정이 중요하다'면서 내게 그런 모습을 봤다고 말씀해 주셔서 정말 감사했다. 최성원 선수와 친해지고 나서 '형이 내 멘토다. 형의 모든 것을 연구했다'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랬더니 최성원 선수가 '와, 내 스토커였네'라며 웃어주더라. 가끔 같이 훈련하고 월드컵도 같이 나간다. 같은 팀에 들어간 이후 당구가 더 좋아졌다. 혼자 계산하고 문제를 풀다가 동료가 생겨서 같이 할 수 있는 이 기쁨이 너무 신난다.
-병원 일과 선수 생활을 병행하는 것이 쉽지 않을텐데
▲사실이다.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때문에 더욱 힘들어졌다. 병원에서 주로 하는 일이 기획 쪽 일이다. 병원일 제쳐두고 당구에만 몰두할 수도 없다. 밤이나 주말에 연습을 해야 하는 데 그마저도 쉽지 않다.
-그런데 병원에 동호회까지 만들었다고 들었다.
▲2015년 직장인 대상으로 당구대회가 열렸다. 그 때 우연히 출전했는 데 8강에 올랐다. 그것이 인터넷 기사에 실렸고 병원 홍보팀에서 본 모양이었다. 이후 병원 신문에 메인 모델로 실렸는데 그것이 계기가 됐다. 병원 홍보팀에서 먼저 당구 동호회가 없으니 운영을 해보지 않겠냐고 하더라. 처음에는 거절했다. 일하고 연습하기도 바쁜데 동호회까지는 무리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
▲병원 측에 조건을 내걸었다. 지원금과 대회에 출전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러겠다고 약속을 해주셨다. 일단 운영을 해보고 안되면 다른 의사 선생님이나 교수님께 맡겨야겠다는 생각으로 동호회가 처음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3~4명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30명이 조금 넘는다. 병원 홈페이지를 통해 모집하는 데 대부분 의사 분들이시다. 기념일에는 선수들을 초청해 대회도 열고 레슨도 한다.
![[사진]정성택 제공](https://file.osen.co.kr/article/2022/02/20/202202202112777068_621236a5dc93f.jpg)
-지방에서 대회가 열릴 경우 며칠 동안 머물러야 할텐데
▲맞다. 그래서 휴가, 연차 등을 쓰지 않고 몰아서 사용한다. 동호회 만들 때 조건을 내건 만큼 병원에서 배려해주는 것도 적지 않다. 그래도 철두철미하게 원칙을 지키면서 일한다는 것이 내 소신이다.
-해외 대회도 꾸준하게 나가지 않나
▲처음 월드컵에 나간 것은 2018년이었다. 국내 대회를 통해 어느 정도 분위기를 익힌 후에는 유럽 선수들과 경쟁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기량이 어느 정도인지도 알고 싶었다. 베트남(호치민)을 가장 먼저 갔다. 일단 가깝고 빨리 병원 업무에 복귀할 수 있는 곳부터 가자는 생각이었다. 결승까지 올라가면 너무 길어지니까 복귀가 힘들다. 빨리 귀국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경기에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핑계일 수 있지만 그래서 좋은 성적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작년 이집트 월드컵 때는 자가격리를 했어야 했다
▲출국할 때는 돌아올 때 자가격리를 하지 않아도 됐다. 그런데 현지에 도착했더니 상황이 순식간에 바뀌어 있더라. 귀국 후 자가격리되면서 혼이 좀 났다. 이런 시국에 직원이 그런 일을 당했으니 병원에서도 황당했을 것이다. 그래서 21일 개막하는 터키에서 열리는 앙카라 월드컵에도 출전하지 않기로 했다. 당분간 자숙할 생각이다.
-많은 선수들이 도움이 됐다고 하던데
▲행정 일을 하다보니 성격이 꼼꼼한 편이다. 해외 대회 나갈 때 선수들의 비자 문제나 출입국 관련 문서를 도맡아 해주는 편이다. 이집트 때도 선수들이 자가격리 없이 귀국할 수 있도록 노력했는 데 그게 잘 안되더라. 노력한 만큼 결실을 맺지 못한 것이 아쉽긴 하다. 그래도 선수들이 고맙다고 해줘서 만족한다.
![[사진]정성택 제공](https://file.osen.co.kr/article/2022/02/20/202202202112777068_621236a61e0cd.jpg)
-성적에 대한 아쉬움은 없나
▲솔직히 처음에는 욕심이 없었다. 그저 당구가 좋아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생각해도 지금 이 정도 하는 것이 대단한 일이다. 선수활동을 겸하며 세계 대회까지 나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일주일에 당구장 2번 가는 것도 벅차다. 그것을 병행하는 것 자체가 도전이다. 병원 일만 해도 바쁜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나처럼 일을 병행하면서 선수생활을 유지하는 것도 힘든 데 성적까지 나와주면 욕심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당구를 계속 할 수 있다는 데 만족했다. 그런데 최근 바뀌었다.
-어떻게 바뀌었나
▲올해는 성적에 욕심을 내보기로 했다. 이제 선수생활도 6년째 접어들었다. 그렇다고 하던 일을 그만 둘 수 없기 때문에 연습을 좀더 집중력 있게 하려고 한다. 전에는 잠잘 시간 줄여서 연습했다. 이제 피곤한 날은 연습만 하고 덜 피곤할 때 실전 경기 위주로 훈련한다. 컨디션이 좋을 때 집중해서 게임을 치는 것이 낫다. 주말을 이용해 효율을 높일 생각이다. 그동안 연습구장도 한곳을 정해놓고 했는데 이제 원정도 다니면서 치기로 했다.
-언제까지 이런 생활을 병행할 수 있을 것 같나
▲할 수 있을 때까지는 할 것이다. 다 해보고 싶다. 인생 두 번 사는 것 아니지 않나. 당구에 빠지기 전에는 빨리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싶었다. 그런데 직장 생활도 하고 당구도 치면서 결혼을 굳이 빨리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더라. 비혼은 아니다. 하지만 직장 다니고 연습하고 국내 대회에 월드컵까지. 연애를 어떻게 하겠나. 당구치는 분과는 되도록 인연을 맺지 않으려 한다.
![[사진]정성택 제공](https://file.osen.co.kr/article/2022/02/20/202202202112777068_621236a65592c.jpeg)
-목표가 있나
▲종전 내가 거둔 최고 성적을 넘는 것이다. 코로나 직전인 2019년 슈퍼컵 토너먼트에서 올린 16강이 최고 성적이었다. 두마리 토끼 못잡는다고 한다. 하지만 매년 개인적으로 새로운 도전 과제가 하나씩 생기고 있다. 올해 2022년은 성적이다. 주변에도 일부러 공언하고 다닌다. 국내 대회부터 시드권까지는 아니더라도 10~20위 사이를 유지하고 싶다. 해외 대회도 기회가 되면 출전하고 싶다. 또 병원에도 당구란 스포츠가 다른 종목 못지 않게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 그래서 의사, 교수님들의 후원을 받고 싶다. 병원도 선수생활도 다좋다. '이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나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다. 더 나이 들어서 못하기 전에 이렇게 도전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직장, 당구 선수. 주어진 환경을 조화롭게 병행하는 선수로 기억되고 싶다.
letmeout@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