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인생 밑바닥’ 건달이나 조폭들에게 배신은 곧 죽음이다. 오랜 시간 가깝게 지내며 믿어온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나를 떠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받아들이기도 힘든 일이다. 그 의리라는 두 글자는 키워드가 갖고있는 의미를 넘어서, 건달이라는 무리를 관통하는 핵심이다.
그래서 조직의 패권을 둘러싸고 갈등하는 건달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 ‘뜨거운 피’ 속 캐릭터들은 글자 그대로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다. 다만 그 의리가 ‘멋짐’을 위한 게 아닌,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다른 누아르보다 한층 더 강렬하고 뜨겁다.
‘뜨거운 피’의 외피는 촌구석 바닷마을에 사는 건달의 세계를 그린 배신 누아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희수(정우 분)를 비롯해 손영감(김갑수 분), 철진(지승현 분), 용강(최무성 분), 아미(이홍재 분)라는 보통 사람들의 삶을 그린 드라마로 바꾸어볼 수 있다.

한마디의 말과 결정적 행동으로 금세 태도를 바꾸는 그 가벼운 인간들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담았기 때문이다.
16일 오후 서울 CGV 용산 아이파크몰에서 새 영화 ‘뜨거운 피’의 언론배급시사회가 열린 가운데 이날 기자간담회에는 정우, 김갑수, 지승현, 이홍내 등 배우들과 각색 및 연출을 맡은 천명관 감독이 참석했다.
오는 23일 개봉하는 ‘뜨거운 피’(감독 천명관, 제작 고래픽처스, 제공 키다리스튜디오, 배급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키다리스튜디오)는 1993년 더 나쁜 놈만이 살아남는 곳 부산 변두리 포구 구암의 실세 희수와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한 밑바닥 건달들의 치열한 생존 싸움을 그린다. 김언수 작가의 동명의 소설을 기반으로 천명관 감독이 각색과 연출을 맡았다. 이 영화는 천 감독의 연출 데뷔작이다.


천 감독은 “영화 속 대사에도 나오지만 ‘아무것도 먹을 게 없는 똥밭’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며 “그 속에 아픔과 좌절, 반전이 있는 이야기가 다른 누아르 영화들과 다르다고 본다”고 말했다.
누아르 영화 ‘뜨거운 피’에서 살인은 그저 죽음이 아니다.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마음 속에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이 끓어오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의 현장은 돈과 권력에 대한 욕망을 담았다. 건달 생활에 회의를 느껴 평범한 삶을 꿈꾸는 희수부터 그 틈을 파고들어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다양한 인간 군상이 한데 모였다.
천명관 감독은 이날 원작 소설과 영화의 차이를 묻는 질문에는 “길이”라고 답하며 “긴 소설을 두 시간으로 요약해 얼마나 재미있게 보여주느냐였다. 영화적 리듬감을 갖고 재미있게 보여주고자 했다”고 연출에 집중한 부분을 설명했다.


천명관은 ‘고래’ ‘고령화 가족’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 ‘나의 삼촌 브루스 리’ 등의 소설을 쓴 인기 작가다. 그러나 영화감독으로 데뷔하며 자신의 소설을 연출하지 않았다.
이날 그는 “그 이유는 하나다. 다른 사람에게 (이 영화의 연출권이) 넘어가면 아깝겠다 싶더라. 욕심이 났다”고 밝혔다. 지역 설정에 대해 그는 “물론 ‘부산’ 하면 떠오르는 건달 영화가 많지만 ‘뜨거운 피’는 그것들과 또 다른 세계의 이야기다”며 “저희는 허름하다. 부산에서도 낙후된 작은 항구를 둘러싸고 밑바닥에 사는 사람들의 치열한 생존기를 담았다. 그게 기존 작품들과 다른 점이라고 생각한다”고 비교했다.
천명관 감독은 “제가 오랜 시간 준비를 해왔지만 경황이 없다. 그래도 제 인생의 재미있는 한 과정이었다는 기분이 든다”고 감회를 전했다.
개봉은 이달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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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키다리스튜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