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재동 객원기자] “내가 나라를 팔았다구요? 그래서 우리나라가 팔렸나요? 제가 판 건 저고, 제 기술이예요. 아저씨가 자장면을 만들어 팔 듯 나와 우리 가족이 불행에서 벗어나려면 돈이 필요했으니까... 난 매국노가 아니라 손님이예요. 그러니 자장면 주세요.”
tvN 토일드라마 ‘스물 다섯, 스물 하나’의 고유림(김지연 분)이 러시아로 귀화했다. 성년의 봄을 맞기도 전 몰아닥친 혹독한 성년식이다.
17살 어린 나이로 세상을 제패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서 온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고유림이다. 중국집에선 사인을 받아 걸었고 동네 슈퍼마켓 벽엔 그녀가 광고하는 아이스크림 포스터가 붙을 정도였다.
하지만 백이진(남주혁)이 첫 보도한 ‘러시아 귀화’와 ‘경제적 이유’는 다른 매체의 후속보도를 통해 ‘돈 때문에 나라를 배신’한 원색으로 덧칠됐다.
그녀를 사랑했던 대중들은 실연당했다. 호의는 적의로 바뀌었고 포스터의 그녀 얼굴은 찢겨졌으며 중국집의 그녀 사인은 거칠게 떼어졌다. 김중배의 다이아반지에 순정을 팔아버린 심순애를 보듯 오만 틈새마다 비난과 조롱과 경멸이 밀려들었다.

세상을 배신할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대부분은 세상이 먼저 배신한다. 세상은 고유림에게 최고의 가치가 가족의 행복임에 관심 없다. 그 가족의 행복이 아버지의 교통사고로 산산조각날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도 몰랐다. 여전히 대한민국 국가대표로 절친 나희도와 함께 세상의 피스트를 모두 쓸고다니고 싶은 그녀의 속내를 짐작할 엄두도 안낸다. 죽도록 싫은데, 부모가 남아있고 20년을 사랑받은 대한민국을 떠날 수밖에 없는 사연에 주목할만큼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돈에 팔린 매국노’란 이미지만 물고 뜯을 뿐이다.
백이진의 잘못이다. 특종을 위해 친인을 아프게 해서라기 보단 덜 자란 기자라서 잘못했다. 기자는 특종도 중요하지만 후속보도에도 민감해야 한다. 가장 가치있는 기사는 휴머니즘이 깔린 기사다.
“결과는 빛났고 과정은 아름다웠다”는 사심어린 멘트보다는 담담히 왜 한국의 스타 고유림은 러시아로 귀화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보도했어야 했다. ‘불가근 불가원’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 대중이 묻는 ‘왜?’를 충족시키는 가치있는 기사이기 때문이다.
고유림에게 가족이 어떤 의미인지, 그 가족이 어떤 위기에 처했는지, 그래서 고유림의 선택이 개인적으로 얼마나 불가피했는지 그 보다 잘 아는 기자는 없다.

고유림이 원치 않았을 지라도 ‘러시아 귀화’를 특종보도 했듯이 후속보도를 내보냈다면 대중은 다시 고유림의 편을 들어주었을 지 모른다. 혹은 어떤 기업이 독지가가 되어 고유림의 러시아 귀화를 막아 주었을 지도 모른다. 적어도 ‘고유림 매국노’란 낙서 앞에서 자책하며 오열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어쨌거나 고유림은 걱정하는 부모를 향해 “그동안 다들 나 때문에 희생 많이 했어. 그 희생, 그냥 이번에는 내 차례가 된 거야”라 말 할 만큼 어른이 됐다. 갓 성인이 된 주제에 그렇게 세상의 비난을 홀로 감당하는 가족의 방파제로 성장한 것이다.
고유림만큼 멋지게 자란 또 한 명은 문지웅(최현욱 분)이다. 문지웅은 “진짜 귀화하기로 결정한 거야? 그러면 그 나라 가서 쭉 사는 건가? 힘든 결정이었을 텐데.. 진짜 멋있다. 고유림”이라고 응원해줬다.
해묵은 짝사랑이 이제 막 완성될 참이었는데, 어렵사리 어렵사리 겨우 손 한 번 잡아봤는데.. 하지만 긍정의 아이콘 문지웅은 그 허탈함에 주저앉지 않고 러시아로 떠나갈 어린 연인과의 러시아 재회를 위해 베짱이 생활을 접고 알바 물색에 나선다.
그리고는 “우리 아무것도 약속하지 말자. 계속 좋아할 거라고, 변하지 않을 거라고, 그런 약속 하지 말자. 언제 한국에 올지, 올 수 있을지, 널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약속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는 고유림을 향해 “넌 멀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구나. 난 멀어지지 않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라며 화를 내기도 한다. 그리고 “화났으니 먼저 가”라는 고유림을 향해 “어떤 상황에서도 너 혼자 안 둬”라며 어른스러운 사랑의 진수를 과시했다. 갓 스무살 주제에.

출국일자를 몰랐던 문지웅은 지승완의 문자를 받고 뒤늦게 공항을 스케이드보드로 누빈 끝에 출국 직전의 고유림을 만나 “나도 이기적으로 말할게. 절대 다른 사람 안 만나고 너 생각만 할 거야. 너도 다른 남자 눈도 마주치지 마”라며 고유림에게 입맞춤을 한다.
태양고즈 4인방의 성년은 이렇게 이별과 갈등으로 시작됐다. 하지만 이 청춘들은 제각각 인내의 뿌리를 키워가며 차갑고 뜨악한 틈입자 같은 세파를 견뎌낼 준비를 착실히 해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2009년의 어느 날 앵커가 된 백이진과 또 다시 국제대회 금메달을 딴 나희도의 화상통화.
백이진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항상 같은 마음으로 응원하고 있다”고 말했고 나희도는 “저도 마찬가지다. 제가 어디에 있든 같은 마음으로 앵커님을 응원하고 있다”고 답했다. 그리고 이어진 “늦었지만 결혼 축하드린다”는 백이진의 멘트.
정열과 사랑의 20대를 함께 했던 서른 세 살의 앵커와 스물 아홉의 선수는 한결 단단해지고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그렇게 덕담을 주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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