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재동 객원기자] 엄마가 물었다. “괜찮아? 기다리고 어긋나고 실망하는 거. 한 사람은 계속 미안하고 한 사람은 계속 체념하는 그런 관계가 넌 정말 괜찮냐고?” 희도는 힘겹게 “괜찮아”라고 답했다.
9.11테러 취재를 위해 뉴욕에 가 있는 백이진과 어렵사리 통화가 됐다. 이진이 말했다. “여기는 생지옥이고, 난 매일 악몽을 꾸고, 20년 일한 선배는 기자 따위가 아무리 노력해봤자 세상에 희망은 없대.”
응원하고 싶었다. “니가 지금 느끼고 있는 모든 게 니가 성장하는 과정일 거야. 힘내!” 이진이 답했다. “성장? 난 이딴 감정을 성장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아.” 희도는 느꼈다. ‘더 이상 내 응원이 닿지 않는구나!’
엄마에게 백이진이 뉴욕특파원을 신청했다는 말을 들었다. 희도는 생각했다. ‘백이진은 나한테 또 미안하겠구나. 백이진이 나한테 더 이상 미안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tvN 토일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가 종영했다. 앞서의 과정을 거친 나희도(김태리 분)와 백이진(남주혁 분)의 첫사랑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드라마는 이들 사랑의 분기점마다 터널을 상징적으로 사용했다. 드라마의 시작단계서 빚쟁이 등쌀에 시달리는 백이진을 나희도가 끌고 와 분수쇼를 펼친 후 학교 경비에 들켜 함께 도망치는 장면에서 둘은 그 터널을 함께 빠져나온다. “한순간도 행복해지지 않겠다”는 스물 두 살에게 열 여덟살 소녀가 “몰래 행복해지는 건 괜찮다”며 위로를 전한 뒤끝이다. 함께 빠져나온 터널 밖에선 여름 한 가운데, 초록의 잎사귀들이 바람에 서로의 몸을 비비고 있었다.
고유림의 러시아 귀화를 백이진이 단독보도한 후유증을 묘사할 때도 터널은 등장한다. 두 사람은 ‘고유림 매국노’라 적힌 낙서를 함께 지우며 서로에 대한 이해를 넓혀간다.
이별선언도 터널 앞이다. 백이진은 나희도와의 이별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이거 맞아?"라고 물었고 나희도는 단호하게 "이거 맞아. 난 6개월을 생각했어. 넌 6개월 동안 뭐했니? 우리 멀어져 갈 동안 뭐했냐고. 모른 척 했잖아! 우린 좋을 때만 사랑이야. 힘들 땐 짐이고. 우린 이런 사랑하면 안됐던 거야. 할 줄도 모르면서 겁도 없이 덤볐어!" 라 말하고는 백이진으로부터 멀어져갔다.
나희도가 버스에서 떨어트린 마지막 다이어리가 돌고돌아 마흔 한 살 나희도에게 돌아왔을 때, 그리고 그곳에 적힌 백이진의 마지막 메시지를 읽었을 때 희도는 백이진과의 채 마치지 못한 이별을 매조짓기로 하고 다시 그곳에서 백이진을 만난다.

그 자리서 나희도는 “나도 나를 믿지 못할 때 나를 믿는 너를 믿었어. 그래서 해낼 수 있었어”라고 말했고 백이진은 “너는 나를 웃게 했고, 너랑 있으면 가진 게 없어도 다 가진 것 같았어”라고 화답했다. 이어 나희도는 “어느 순간은 함께라는 이유로 세상이 가득 찼지. 너 때문에 사랑을 배웠고 이제 이별을 알게 되네”라고 고마움을 전했고 백이진 역시 “완벽한 행복이 뭔지 알게 됐어. 네가 가르쳐준 사랑이 내 인생을 얼마나 빛나게 했는지 넌 모를 거야. 정말 고마워”라고 답했다.
희도는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어”라는 진정 어린 마지막 멘트로 오랜 이별에 종언을 고하고는 “이번엔 네가 먼저 가”라고 백이진을 떠나보낸다.
백이진이 떠난 후 홀로 터널을 빠져나오는 나희도에게 그간 삭제됐던 기억 하나가 돌아온다. 그 해 여름 포항 바닷가의 추억.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아 그 해 여름을 온전히 그들의 것으로 돌려놓았다.
첫 장면에선 힘겨운 세파를 상징하는 터널을 둘이 함께 빠져나와 싱그러운 여름 밤을 맞았다. 사랑의 시작이고 희망의 출발점이다. 두 번째 장면 성년이 돼선 터널 안에서 함께 세상의 냉혹한 적의를 함께 지워나갔다. 세 번째 장면에선 이진을 남겨두고 희도가 먼저 떠나버렸다. 희도는 그렇게 오랜 시간 백이진을 터널 앞에 남겨놓은 탓에 이별을 매듭짓지 못했었고 마흔 한 살이 돼서야 마흔 다섯의 이진을 먼저 떠나보내고 그 터널을 되짚어 돌아나오면서야 이별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뜨거웠던 청춘의 체온은 그렇게 시나브로 식어갔지만 그 열기를 발산했던 치기어린 시절은 찰나에 불과할 지라도 추억으로 박제돼 늙은 미소로 간직될 것이다.
‘스물다섯 스물하나’ 최종화는 11.513% 자체 최고시청률을 경신하며 종영했다. 시청자들 가슴에도 청춘의 추억을 소환했으리라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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