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재동 객원기자] 고향 제주는 익숙하고도 낯선 곳. 푸른 바다는 한가로운 잔물결이 숱한 이랑을 만들며 햇볕을 받아 물비늘을 반짝이고 있었다. 하지만 한수(차승원 분)의 가슴속엔 더러워진 천장처럼 먹구름이 도사린 채 연신 불안과 근심의 뇌우를 쏟아붓고 있었다.
옴니버스 형식의 20부작 tvN 토일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극본 노희경, 연출 김규태 김양희 이정묵)는 최한수와 정은희(이정은 분)의 이야기로 시작됐다.
최한수는 푸릉은행 서울 지점에서 제주지점으로 발령났다. 내막이야 어떻든 겉보기엔 좌천이다. 한수는 길이란 길은 모두 끊겨버린 듯한 암담함에 사로잡힌 채 50을 바라보는 나이에 그렇게 고향 제주로 돌아왔다.
외면하고 싶었던 고향이다. 깻말 팔아 목포 수학여행을 다녀올만큼 제주서 보낸 학창시절은 가난했다. 2남 3녀의 장남으로 공부는 잘한 덕에 서울로 유학을 떠나올 수 있었다. 동생들은 그 뒷바라지를 위해 고등학교를 겨우 졸업한 채 육지의 공장으로, 식당으로 일자리를 찾아나서야 했었다.
하지만 그 잘난 아들, 오빠, 형은 골프로 잘난 제 딸 보람의 미국 유학을 위해 홀어머니 봉양조차 동생들에게 떠넘기고 말았다. 7년간의 기러기 생활이야 제가 감당할 문제지만 당연히 어머니와 동생들 볼 면목조차 없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보람이라도 승승장구했으면 좋으련만 불안감이나 주위 시선에 대한 지나친 의식 등이 원인이 되어 근육의 통제에 문제가 생기는 입스로 인해 프로 2부에 가까스로 잔류해 있다. 그 뒷바라지에 돈은 끊임없이 들어가는데 더 이상 돈을 융통할 방법은 꽉 막혀있다.
고향 제주에는 여전히 친구들이 남아있다. 하지만 한수로선 선뜻 다가서기 꺼려지는 친구들이다. 홀어머니 어려울 때 대신 신경써준 친구들이다. 홀어머니와 동생들의 희생을 딛고 자리잡은 내막을 다 아는 친구들이다. 그래놓고 어머니 봉양조차 동생들에게 미룬 그 뻔뻔한 처세를 친구들은 어찌 바라볼까 싶은 자책감이 한수를 낯설게 만든다.

하지만 친구인 같은 은행 김명보 팀장(김광규 분)의 채근으로 동창회에 나가게 되고 그곳에서 목포 수학여행에서 자신의 입술을 훔쳤던, 한수가 첫사랑이라 공언하고 다녔던 당찬 여자 사람 친구 정은희(이정은 분)와 재회했다.
한수가 깻말 팔아 수학여행을 갔던 것처럼 은희는 새끼 돼지를 팔아 수학여행을 갔었다. 수학여행 직후 은희는 갑작스런 모친 사망으로 졸업도 못한 채 학업을 포기하고 소녀가장으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리고 이제는 수산물 가게 몇 곳과 까페 건물과 현금 23억원을 예치하고 있는 미혼의 억척 알부자로 성장해 있었다. 동생들의 학비와 생활비, 집마련까지 해준 능력있는 누나 노릇도 거뜬히 감당하면서. 게다가 그녀는 아직도 한수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여동생에게 2억을 빌리려다 해묵은 원망만 들어야했던 한수다. 정말 길이 안보인다. 미국의 딸은 ‘돈이 없어’ 골프를 포기하겠다고 말한다. “아빠가 해결하겠다”고 큰소리는 쳐놨는데.. 철면피하지만 어쩐지 은희에게 의지하고 싶은 생각이 시나브로 짙어진다.
진탕 취한 동창회 다음날을 은희와 함께 보낸 한수. 새벽 수산물 경매시장도 동행하고 학창시절 어울려 놀던 바닷가도 찾아본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난했지만 근심을 내려놓고 물장난을 치던 어린 시절의 자신을 마주한다. 형편은 그때가 훨씬 힘들었지만 그 시절의 한수는 빛났다. 바다는 자신의 넓은 품으로 한수의 가능성을 보듬어 주었었다.
한수는 피폐해지고 초라해진 자신의 내면을 씻어내기라도 하듯 바다에 뛰어들지만 바다의 품에서조차 구질구질한 현실을 벗어나지 못한다. “은희야, 나 돈 좀..” 목구멍으로 먹어들어가는 소리를 내는 한수를 젊은 시절의 한수가 한심하게 바라본다.
은희에게 그때처럼 목포로 여행을 가자 제안한 것은 충동적이었다. 추억여행을 떠나 빛났던 청춘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족사진을 감추고, 아내와 별거중이라 거짓말하고, “이혼하려고?” 묻는 은희에게 고개를 주억거리는 자신을 발견하고 만다. 정말 쓰레기가 되어가는 기분.
그런 한수에게 은희는 말한다. “네가 엉망진창 망가져서 나타났으면 난 정말 슬프고 우울했을 거야. 내 추억이, 청춘이 망가진 것 같아서... 이렇게 잘 자라서 내 찬란한 추억과 청춘을 지켜줘서 고맙다.”

은희의 첫사랑 한수는 정말 멋진 친구였다. 돼지를 끌어안고 올라탄 버스 안에서 악동 친구들의 놀림을 막아줬었다. 목포 수학여행에선 은희의 대책없는 키스 세례를 그저 놀란 얼굴로 받아줬었다. 친구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들통난 “한수에게 키스당했다”는 자신의 거짓말도 “너도 좋아했잖아”라고 인정해줌으로써 감격의 기절을 경험하게 해준 고마운 친구였다.
그날의 키스는 은희 평생 첫 키스였고 그날의 한수는 은희 평생 유일한 사랑이었다. 그랬던 한수가 이혼을 앞두고 별거중이란다. 한수가 목포여행을 제안했을 때 ‘아직은 유부남’이라고 거절했지만 마음이 동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결국 함께 올라탄 목포행 배다. 자신을 향해 “잘 자라 주었다”고 말하는 한수. 은희는 가슴이 먹먹하게 벅차올랐다. “내 첫사랑은 아직도 이렇게 멋있다”고 바다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작가는 “무너지지 마라. 끝나지 않았다. 살아있다. 행복하라고 응원하고 싶었다”고 작의를 밝혔다. 되돌아 갈 수 없고 되물릴 수 없는 삶 속에서 상처입은 영혼들을 위해 작가는 고향과 묵은 사람들을 장치해 놓았다.
돌아갈 곳이 있는 이는 무너지지 않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인연들이 있는 이는 외롭지 않다. 객지에서 스쳐가면 그뿐인 인연들 속 소외되고 상처받은 이들에게 고향과 묵은 사람들은 세월을 빗겨 저쪽에서 아프지 말라고, 외롭지 말라고 묵묵히 응원해주곤 한다.
그래서 한수는 은희에게 결국 돈 얘기를 꺼낼까? 그렇게 바닥을 치고 은희의 부축으로 다시 치유될 수 있을까? 은희의 손에 한수가 발라준, 한수의 발에 은희가 발라준 빨간 약 요오드팅크처럼 서로가 서로를 치유해줄 수 있을까? 그리고 사람 얘기에 천착하는 노희경 작가의 응원은 과연 등장인물들과 시청자에게 위안이 될 수 있을까?
막 시작한 ‘우리들의 블루스’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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