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방일지’ 손석구 날자 ‘소외의 벽’엔 금이 쫘악 [김재동의 나무와 숲]
OSEN 김재동 기자
발행 2022.04.18 10: 44

[OSEN=김재동 객원기자]  그가 어쩌다 이 마을에 스며들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염창희(이민기 분)가 어렵사리 물었을 때 그는 간단하게 답했다. “차를 잘못 내려서.”
아무와도 말을 섞지 않는 그가 하는 일은 아버지 염제호(천호진 분)의 싸구려 씽크대 만드는 일을 돕거나 밭일을 거드는 것 뿐이다. 나머지 시간의 대부분을 그는 평상에 우두커니 앉아 끊임없이 소주에 젖어들어간다.
“나를 추앙해요”라고 당돌하게 요구하는 염미정(김지원 분)에게 그는 “내가 뭔가를 하고 싶어하는 것 같아?”라고 물으며 “나는 아무 것도 안해. 사람과는.”이라고 내친다.

JTBC 토일드라마 ‘나의 해방일지’(극본 박해영, 연출 김석윤) 속 구씨(손석구 분)는 제각각의 사연으로 소외된 모든 등장인물중 가장 극단적인 캐릭터다. 우주에서 철저하게 혼자인 듯한, 대양 한복판의 난파선 조각같은 존재다.
마치 허먼 멜빌의 주인공 ‘필경사 바틀비(Bartleby the Scrivener)’를 연상시킨다. 벽으로 둘러싸인 월스트리트의 변호사 사무실에 대서소 역할을 하는 필경사로 고용된 바틀비는 스스로를 외부와 단절한 채 쉼없이 일을 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며 업무를 거부하기에 이르고 해고를 통보해도, 퇴거를 명령해도, 사무실을 고수하다 결국 구치소로 끌려간다.
구치소에서도 ‘먹지 않는 편을 택한’ 바틀비는 결국 죽고만다. 죽고나서야 바틀비의 전직이 배달불능우편취급소에서 사서(死書)를 소각하는 업무 담당이었음이 밝혀진다.
누군가에게 절실하거나 소중한 사연을 담은 우편물이 전달되지도 못한채 소각되는 장면을 보면서, 혹은 자신과는 무관한 남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대필하면서 바틀비가 느꼈을 세상의 벽은 얼마나 높고 굳건했을까.
혹자에게는 유용함으로만 인간을 평가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읽힐 수도 있고 혹자는 부조리한 세상에 대처하기 위해 세상의 법칙에 저항하는 자유의지를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드라마 얘기를 하면서 허먼 멜빌까지 끌어들이는 것은 틀림없이 과한 일일테지만 개인적으로 작가가 세상에 동화되지 못한 캐릭터 설명을 위해 쓴듯한 ‘추앙’이니 ‘갈구’니 등의 일반적이지 않은 대사에서 ‘안하는 편을 택하겠다’는 바틀비의 비일상적 표현을 떠올렸고 드라마 초반 ‘나의 해방일지’속 주인공들에게선 하나같이 바틀비처럼 벽에 갇힌 소외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 염제호는 그냥 사는 사람이다.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잠자리에 누울 때까지 한시도 쉬지 않는다. 40만원은 받아야할 씽크대를 30만원으로 후려치는 불량고객 앞에서도 순순히 물러나고 마는 손해보는 인생을 평생 살아왔다. 그런 그에게 아들 염창희가 대거리한다. “아버지 인생은 계획대로 되셨습니까? 계획하고 여기까지 오신 거냐고요?”
그 자식 3남매는 출근길 마을버스와 퇴근길 지하철 막차시간표에 꼼짝없이 매여산다. 경기도 남단 끝에 자리잡은 집은 근무지를 서울에 둔 그들의 삶을 통제하는 교도소 담장에 다름 아니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택한 탈출구는 사랑이다. 사랑이 당장 집을 서울로 옮겨줄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출근 전·퇴근 후의 여유를 안겨줄 것은 아니지만 그들을 숨막히게 하는 현실을 잊게는 해줄 수 있으리란 믿음이 있다.
하지만 그도 쉽지는 않아보인다. 3남매중 유일하게 연애를 경험한 염창희의 말로가 그를 증명한다. 염창희는 애인에게서 “참을 수 없이 촌스럽다”는 결별통보를 듣고 만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장녀 염기정은 필사적으로 사랑에 매달린다. 젊어서 시절 좋을 때 따졌던 종착역같은 사랑은 언감생신, 더 저물기 전에 아무나라도 좋으니 한번만 뜨겁게 사랑해 보길 꿈꾼다.
안달복달하는 언니, 오빠와 달리 말없는 염미정도 생각하면 좋기만한 사람 하나를 소망한다. 말 없다고 속 없는 것 아니다. 또래들의 유쾌하고 소란스런 대화에 끼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기쁨과 슬픔과 시샘과 질투가 전혀 가슴에 와닿지 않기 때문이다. 저들은 종알대는 말처럼, 호들갑스럽게 터져나오는 웃음처럼, 즐겁고 행복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렇지못한 내 인생은 뭐지?
이런 염미정의 염장이라도 지르듯 망할 놈의 회사는 끊임없이 사내 동호회에 들기를 권유한다. 다행히 회사 부적응자가 염미정 하나만은 아니었다. 전략기획실 박상민 부장(박수영 분)과 싱글대디인 조태훈 과장(이기우 분)이 함께 시달리고 있었다.
그녀는 문득 ‘해방’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뭐로부터의 해방인지, 무엇을 위한 해방인지까지는 미처 생각 못했지만 ‘해방’이란 강렬한 어감이 그녀를 사로잡는다. 염미정은 박부장과 조과장을 설득해 ‘해방클럽’이란 사내동호회를 발족시킨다.
그리고 그런 염미정 눈에 구씨가 들어온다. 그로 인해 그녀가 해방될 수 있을런지, 뭔가에 포위된 듯한 그를 그녀가 해방시킬수 있을런지는 모르지만 ‘해방’이란 단어는 부지불식간에 구씨와 등치되는 기분이다.
내색은 않지만 구씨 역시 자신을 신경쓰는 염미정에게 자꾸 신경이 쓰인다. 그리고 4화에서 바람이 날려보낸 염미정의 차양모를 구하기 위해 구씨는 날아오른다. 그리고 그 위로 “추앙은 어떻게 하는 건데?”라는 구씨의 질문과 “응원하는 거. 넌 뭐든 할 수 있다, 뭐든 된다, 응원하는 거”라는 염미정의 대답이 울려 퍼진다. 마치 주인공들 스스로가 쌓아올린 소외의 벽에 금이 가는 소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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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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