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방일지’ 손석구, 김지원의 ‘좋기만 한 사람’ 될까? [김재동의 나무와 숲]
OSEN 김재동 기자
발행 2022.04.24 11: 17

[OSEN=김재동 객원기자] “다른 사람이 된다고?” 구씨(손석구 분)는 자신의 심장이 ‘다른 사람’이란 말 한마디에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할 줄은 몰랐다. 그 단어는 꿀처럼 달콤하게 귓바퀴에 스며들어 어느덧 녹슨 혈관을 씻어내고는 박동을 잊은 심장을 다시 가동시키는 듯 했다.
자신을 추앙해서 다른 사람이 되는 편이 낫지 않겠냐는 염미정(김지원 분)의 엉뚱한 도발은 그렇게 구씨에게 적지 않은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그 말을 듣고서야, 그리고 그 말 끝에 자신의 심장고동을 다시 느끼고서야, 구씨는 스스로 현재의 자신을 얼마나 혐오하고 있는 지 깨달았다.
23일 방송된 JTBC 토일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는 염미정의 치기어린 도발로 시작된 미정과 구씨의 관계가 급진전됐다. 미정은 구씨를 자신에게 ‘좋기만 한 사람’으로 만들 작정을 했고 구씨는 미정을 본격적으로 ‘추앙’하기로 했다. 이같은 관계진전을 구씨의 입장에서 살펴본다.

알콜로 사는 세상은 그동안 그에겐 너무도 당연한 일상이었다. 그가 왜, 무엇 때문에 알콜 중독이 된 지는 중요치 않다. 아니 알콜 중독 자체가 원인일 것이다.
알콜릭이라 해서 단시간에 대량으로 마실 필요는 없다. 다만 끊임없이 홀짝홀짝 마시면 된다. 이 단조로운 행위는 그의 감각을 서서히 마비시키고 그의 복잡한 상념을 중단시키며 그에겐 그야말로 끔찍한 고역일 수 있는 시간들을 무감각하게 학살해 나간다. 그는 그저 학살당하는 시간들을 무기력하게 지켜보며 몸과 정신이 녹아 내릴 때까지 같은 행위를 반복만 하면 되었다.
그에겐 희망이란 것이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희망을 거부하는 편이었다. 파멸적인 호기심을 가진 여자 판도라가 연 재앙의 상자 속에 희망이 있었다는 말은 희망조차 재앙의 일종일 수 있다는 의미다. 판도라가 그 희망을 남겨두고 뚜껑을 덮은 것은 차라리 다행일 지도 모른다. 어쩌면 인간이 희망을 품음으로써 또다른 불행의 늪에 빠질 것을 안타까워 한 신의 배려일지도 모를 일이긴 하다.
그런 삶은 너무 당연해서 구씨는 다른 인생에 대한 고려를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란 말 한마디가 트리거로 작동했다. 그제서야 정작은 그런 삶에 스스로 충분히 질려있었고 그래서 벗어나길 염원하고 있음을 깨닫게 됐다.
염미정의 말에 의하면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선 추앙이란 걸 하면 된다고 한다. 사전을 찾아보았다. ‘높이 받들어 우러러봄’이란 의미. 모호하다. 염미정에게 물었다. “추앙은 어떻게 하는 건데?” 염미정이 답했다. “응원하는 거. 너는 뭐든 할 수 있다, 뭐든 된다고 응원하는 거”라고.
마침 미정네 가족과 고추를 따다 잠시 쉬는 사이 갑자기 불어온 바람 한줄기가 염미정의 차양모를 날려버렸다. 그 차양모를 줍기 위해 구씨는 도약했다.
그럼에도 특별한 변화는 없었다. 개수대에 쌓인 그릇을 씻을까? 방 한가득 모아둔 소주병을 치워볼까? 하지만 늘상 그랬듯 소주를 사러 나가기로 한다. 소주 두 병을 사 편의점을 나서는 순간 마침 역을 빠져나오는 염미정과 마주친다. 부끄럽다. 자신은 염미정을 추앙하기 시작했음에도 아직 다른 사람이 되지 못했다.
부족한 소주를 사러 나가던 길. 모기약을 사오던 미정과 마주친다. 미정은 구씨를 위해 덩달아 사온 소주를 건네고 구씨는 다시 한번 확인한다. "확실하냐. 봄이 오면 너도 나도 다른 사람 돼 있는 거? 추앙하다 보면 다른 사람 돼있을 거라지 않았나" 염미정은 답한다. "한 번도 안 해봤을 거 아녜요. 난 한 번도 안 해봤던 걸 하면 그 전하고는 다른 사람이 돼 있던데."
염미정을 좀 더 추앙해보기로 했다. 주급을 받은 김에 염제호(천호진 분)에게 염미정의 전화번호를 받아 문자를 한다. “돈이 좀 생겼는데. 뭐 먹고 싶은 것 없어? 나 구씨.”
구씨는 역 앞에서 미정을 기다려 근처 경양식 집에서 돈까스를 함께 먹는다. 먹는 와중 냅킨도 꺼내 미정에게 건네본다. 돌아오는 길엔 염미정의 이야기도 들어준다. “좋기만 한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내가 좋아하는 것 같은 사람들도 다 불편한 구석이 있어요. 진짜로 좋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구 씨가 되묻는다. “좋기만 한 사람이 왜 없어? 식구들 있잖아.” “언니, 오빠는 많이 싫고 아빠는 불쌍해요. 한번도 행복했던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엄마는 자식들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좋기만 한 사람이 없어서 채워지지가 않아요.”
“가짜로 해도 채워지나? 이쁘다. 멋지다. 아무 말이나 할 수 있잖아” “말 하는 순간 진짜가 되던데 모든 말이 그렇던데... 해봐요 한번. 아무 말이나.” 가만히 미정을 응시하던 구씨 끝내 아무 말 못하고 앞서 간다. 스스로는 미정과 함께 한 시간 동안 몇 번의 미소가 자신의 입가에 머문 줄 의식하지도 못한 채.
사실 구씨는 자기 편 없이 늘 혼자라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곁에 앉아서 충고해 주는 사람, 다르게 살아야 한다고 잔소리 해줄 사람이 필요했을 것이다. “사람이랑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라며 밀쳐내고 거부했지만 정작은 그 외로운 자아를 치유해줄 사람의 온기가 필요했던 사람이다.
판도라의 상자를 벗어난 희망과 그 희망이 주는 위안은 재앙의 또다른 모습일 수도 있지만 사람을 살게 하는 필수 영양소임은 분명하다.
외로운 영혼 구씨가 과연 염미정의 ‘좋기만 한 사람’으로 기록될 수 있을 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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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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