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재동 객원기자] 그 아이는 경찰이 되고자 했다. 아무도 자신을 함부로 할 수 없는 힘을 갖고 싶어했다. 그래서 난 경찰이 됐다. 그 아이는 항상 정의로웠다. 나 역시 정의로운 경찰이 되고자 노력했다. 그 아이는 나의 영웅이었으므로. 그리고 그 아이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열 다섯 살 그 모습 그대로. 나는 또 그때처럼 그 아이를 죽여야 하나?
‘부산행’ 연상호 감독의 애니메이션을 원작으로 하는 12부작 웹드라마 ‘돼지의 왕’(탁재영 극본, 김대진·김상우 연출)이 가파른 클라이막스를 넘고 있다.
17일 OCN 채널을 통해 9, 10화 연속방영된 드라마는 마침내 20년 전 사건의 속살을 드러냈다. 황경민(김동욱 분)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는 연쇄살인의 도화선이 된 20년 전 김철(최현진 분)의 공개투신자살 진상이.
서동경찰서 강진아(채정안 분) 경위는 부부동반자살 추정 사건현장에 도착해 사망한 아내만 남긴 채 잠적한 남편 황경민이 남긴 메시지를 발견한다. “정종석 형사님께. 종석아 오랜만이다. 나 황경민이야. 잘 지내지?” 정종석(김성규 분)은 강진아의 경찰대 후배다.
강진아는 회계사 출신에 신석운수 대표인 남편 황경민이 정종석과 같은 중학교를 다녔으며 황경민의 자퇴와 정종석의 전학이 엇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졌음을 알게 된다.
한편 정종석은 차기 팀장이 예약된 서울청 광역수사대 형사로 다크웹을 통해 살인청부 지령을 내리는 닉네임 ‘dogpark’을 쫓고있던 중 선배 강진아의 방문을 맞는다. 그리고 강진아의 입을 통해 듣게 된 이름. 황경민. 20년을 묻어두었던 그 이름이 봉인을 뚫고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강진아는 수사를 통해 황경민이 트라우마로 인한 정신장애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동반자살을 시도한 것은 황경민이 아닌 그 아내임을 밝혀낸다. 아울러 황경민의 트라우마가 그의 중학시절과도 연관된듯한 느낌을 받지만 정종석은 당시 얘기를 회피하며 의심을 부추긴다.
그러던 차에 카센터 사장 안정희(최광제 분)가 집에서 처참하게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현장에서 다시 정종석을 향한 “함께 하자”는 황경민의 메시지가 발견된다. 피해자 안정희 역시 황경민과 중학교 동창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신석중 출신들을 상대로 한 황경민의 살인행각. 광수대로 넘어간 사건을 파견형식으로 지원하게 된 강진아는 정종석의 광수대와는 별개로 20년 전 사건을 추적한다.
그리고 황경민이 안가처럼 사용하는 옛 노래주점을 찾아내고 그 곳에서 ‘돼지의 왕’이란 황경민의 비망록을 발견하고 만다. 그리고 마침내 드러나는 20년 전 사건의 진실.
김철은 일진 무리에 괴롭힘을 당하는 황경민과 정종석을 위해 대신 싸워주었고 3학년 선배 일진무리까지 퇴치한 영웅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과 박찬영(배유람 분)의 비열한 술수로 비참한 가정사가 까발려지며 그가 경멸하는 개·돼지들로부터 모멸을 당하게 된다. 김철은 황경민과 정종석에게 자신은 놈들에게 자신의 살 한 점도 줄 수 없고 놈들을 평생 괴롭게 만들 것이라며 공개자살을 예고한다.
하지만 철은 아버지 유품을 정리하면서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한 아버지의 사랑과 홀로 남은 어머니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살아갈 의욕을 되찾는다. 결국 투신자살 대신 투신자살 쇼만 하기로 하고 이 사실을 종석에게만 알린다.
전체 조회가 열리던 날 철은 옥상 난간에 올라섰고 전교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럴듯한 연출을 하던 중 종석이 그를 밀어버린다. 그리고 그 모습을 경민이 목격하고 만다. 김철은 그렇게 죽었다.

종석에게 철은 영웅이고 신이었다. 놈들에게 내 살 한 점 주지 않을 거라 말하는 철은 얼마나 비장했던가. 너희들만은 나를 웃는 모습으로 기억해 달라며 사진을 찍는 모습은 얼마나 의연했던가.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결기는 또 얼마나 용감했던가.
그 감동의 순간을 함께하고 웅장한 가슴으로 나섰을 때 강민(오민석 분)의 전언이랍시고 길을 막아선 채 찌질한 말만 주절대는 박찬영은 얼마나 가소로웠던가. “철이는 신이야. 아직 끝나지 않았어”라 뱉어줬을 때의 통쾌함은 또 어떻고.
그랬는데, 그랬던 철이였는데 마음을 바꿨단다. 그리고 마음을 바꾼 철의 계획은 황경민스럽고 정종석스럽지 결코 김철답지 않았고 영웅스럽지가 않았다. 영웅에겐 그에 걸맞는 최후가 필요하다. 철은 오래도록 영웅으로 남아야 한다.
그렇게 보낸 철이인데 사건을 수사하며 만난 동창 누구도 그를 영웅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안타깝게 죽은 아이 정도로 그저 연민할 뿐. 종석 스스로도 철을 잊었다. 외면했다. 황경민이 아니었다면 무덤에 이르기까지 철의 기억을 봉인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황경민에 의해 다시 되살아난 김철은 종석의 눈에도 채 피지 못해 가련하고 억울한 15살 소년일 뿐이었다. 자신이 완수한 영웅 철의 죽음은 그렇게 하잘 것 없는 죽음이 되고 만 것이다. 그걸 부정하듯 종석은 다시 한번 김철의 환영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동경·경외 등의 감정에는 척력(斥力)과 인력(引力)의 미묘한 상호관계가 작용한다. 그 대상에겐 한없이 끌리지만 그 대상이 단을 내려와 자신과 같아지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기 십상이다. 김철이 그 영웅적 행보를 변경했을 때 종석의 동경은 치명적인 배신감으로 변했을 수 있다. 철을 밀어버린 것은 자신의 영웅에 대한 예우일 수도, 변절한 영웅에 대한 증오일 수도 있다.
중요하고 분명한 건 정의로운 경찰을 꿈꾸고 어머니와 앞날의 행복을 꿈꾸던 김철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한, 그저 그 꿈을 짓밟는 무자비한 살인이었다는 것. 종석은 자신을 비호해준 철에게, 저를 가해한 어느 누구보다 모진 가해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나날이 심각해지고 있는 학교폭력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이 드라마는 강한 메시지와 함께 숨돌릴 틈 없는 긴장감과 서늘한 슬픔·안타까움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강력한 흡인력을 과시하고 있다.
김동욱·김성규·채정안 등 배우들의 연기는 배역에 녹아들어 시청자들의 공감을 끌어냈고 능숙한 완급조절은 메시지에 천착하지만 짓눌리지는 않게 만드는 구성의 묘를 살렸다. 영웅이 그리웠던 치기어린 시절의 핏빛 비망록. 이 재밌는 드라마가 2회분만 남은 것이 많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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