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재동 객원기자] 불길이 솟구쳤다. 어린 시절 당했던 가정폭력과 학교폭력으로 금 간 심장 곳곳에서 균열을 따라 열화가 치솟아 올랐다.
발화점은 사진 속 어린 시절 소중한 친구의 미소였다. 철. 그 아이 이름은 김철이었다. 본가 창고에 깊숙이 방치된 옛 물건들 틈에서 철이는 20년 만에, 생전 단 한번 보여주었던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엔 20년 전의 찐따, 나 황경민과 또 다른 찐따 친구 정종석이 굳은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랬다. 종석이가 있었다. 정종석이.
TVING 공개 웹드라마 ‘돼지의 왕’(탁재영 극본, 김대진·김상우 연출)이 24일 종영했다. 연쇄살인범 황경민(김동욱 분)과 그를 쫓던 형사 정종석(김성규 분)은 20년 전 김철(최현진 분)이 떨어져 죽은 그 자리에서 한 수갑에 묶인 채 추락사한다. 안타까운 새드엔딩.
학교폭력을 정면으로 다룬 이 드라마는 피해자의 가해자에 대한 핏빛 응징을 그리고 있다. 20년의 세월도 피해자 황경민의 응어리를 녹여내진 못했다. 다만 안정희(최광제 분)-강민(오민석 분)-박찬영(배유람 분)에 대한 연쇄살인과 최석기(이경영 분)에 대한 살해 시도까지 이어지는 황경민의 잔인한 보복행로는 과해 보이는 측면이 있었다.
이유는 마지막회에서 밝혀졌다. 20년 전 공개자살을 예고한 철과 셋이 함께 찍은 사진. 황경민은 그 사진에서 철이의 미소만큼이나 종석의 얼굴을 화인처럼 가슴에 새겼던 것이다.

경민에게 종석은 동병상련이라서 더욱 속정이 깊었던 친구였다. 두 사람의 중학시절은 썩은 두엄 속 같았다. 강민, 안정희 등 개 같은 무리들은 그들을 끊임없이 착취했고 반 친구란 허울을 뒤집어 쓴 나머지 돼지 같던 무리들은 그에 동조해 그들의 자존감을 뿌리까지 갉아먹어갔더랬다.
구원은 있었다. 김철. 그 아이가 황경민과 정종석의 앞을 가려줬다. 김철은 한 마리 늑대와 같았다. 꺾이지 않는 투지와 독기로 무장한 채 강민 일당뿐 아니라 3학년 일진 무리까지 처절하게 물리쳐냈다.
하지만 영광도 잠시. 아버지의 부고가 당도하고 그 틈을 탄 박찬영의 비열한 계략으로 전교생의 동정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힘으로 꺽으려 했다면 몇 번이고 일어나 끝내 물리쳤을 철이지만 이 비열한 계략에는 속수무책.
철은 다시 한번 결단한다. “개새끼들이 보는 앞에서 학교 옥상에서 뛰어내릴거야.” 공개자살예고. “날 떠올릴 때마다 무서워서 벌벌 떨게 만들거야. 그렇게 고통 속에서 평생 살게 만드는 거, 내가 개새끼들에게 내리는 저주야.”
그 순간 종석은 격동했고 경민은 걱정했다. 종석에게 철은 투사고 영웅이고 신과 같아 보였고 경민은 그런 끔찍한 결단을 내린 친구가 너무도 안타까웠다.
하지만 철은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며 부정(父情)과 함께 모정(母情)을 확인하였고 홀로 남겨질 어머니(우미화 분)에 대한 걱정으로 계획을 공개자살 쇼로 수정한다. 마지막 선물처럼 자신의 애장품 야구공을 경민에게 넘겨주고 종석을 만난 철은 종석에게 수정된 계획을 알려주고 그 모습을 걱정돼 따라나섰던 경민이 목격한다.
공개자살 예고날. 옥상 난간에 선 철을 종석은 밀어버리고 그 모습을 경민이 목격한다.

철이 공개자살을 예고한 날 찍은 사진은 그 모든 기억을 경민에게 한꺼번에 되살려주었다. 철의 미소는 안타까웠고 뉘우침도, 사무침도 없이 삶을 속이면서 살고 있는 종석의 모습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응징의 현장마다 종석에게 메시지를 남긴 것은 옛 친구가 그날의 일을 고백하고 속죄하기 바라는 미련 때문이었다. 하지만 친구는 오불관언. 결국 철이 할 바를 자신의 손으로 매조짓기로 결심하고 모든 일의 시작점. 삶의 대부분을 옭아매던 신석중학교로 종석을 불러들인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몰려서도 종석은 반성이 없었다. “내가 널 구해준 거야. 철이가 그렇게 죽지 않았다면 넌 계속 지옥에서 살았어야 됐다구!” 종석은 그렇게 또 하나의 돼지가 돼 있었다. 친구를 돼지로 남겨둘 수는 없다. 경민이 간곡하게 당부한다. “종석아, 이제 그만 철이한테 가자!” 그 간곡한 시선에 종석은 결국 난간을 잡고 지탱하던 손의 힘을 풀고 동반추락 하고 만다.
사람이 살면서 잘못 한 번 안하고 살기는 힘들다. 그리고 잘못을 했으면 제대로 뉘우쳐야 한다. 적당히 입에 발린 소리나 건성인 악수로 얼버무려선 안된다. 이때 유념할 건 주변의 시선이 아니라 제 가슴 속 양심의 소리다. 제대로 뉘우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잘못한 것 보다 더한 수치다. 이 드라마에서 3학년 일진 역을 맡아 나중에 사회부 기자가 되는 김종빈(조완기 분)은 드라마가 제시하는 단 하나의 희망이다.
모든 폭력은 피해자에게 씻을 수 없는 굴욕감을 안긴다. 그 굴욕감은 트라우마로 자리잡아 한 사람의 인생을 망쳐버릴 수 있고 그렇게 망쳐진 인생들은 이 공동체를 바닥부터 위협하는 종양이 될 수도 있다.
‘돼지의 왕’이 전하는 섬뜩하지만 현실적인 메시지가 자못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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