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재동 객원기자] “그 전에 왜 몰랐을까? 그 것만으로 충분한 걸.”
KBS 2TV 수목드라마 ‘당신이 소원을 말하면’ 속 우리 호스피스병원 ‘팀 지니’ 강태식(성동일 분) 반장의 대사다.
강태식은 31일 방송된 7회분에서 윤겨레(지창욱 분)에게 자신의 이력과 겨레를 애써 잡는 이유를 밝혔다.
강태식은 밝히지 못할 죄 때문에 정상적으로 살아갈 면목이 없었다. 벌 주는 심정으로 자발적 노숙 생활을 했다. 그러다 폐암 진단을 받고 우리 호스피스 병원으로 향하던 길. ‘살아서 무엇하나’ 싶은 김에 병원 인근 강물에 투신했지만 서연주(최수영 분) 등 병원 식구들에게 구조돼 삶을 이어가게 된다.
그리고 기적적인 완치, 덤으로 사는 삶 봉사에 매진하기로 했다. 그리고 최근 암이 재발했고 그를 대신해 팀 지니를 맡아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강태식은 윤겨레에게 그 일을 넘겨주고 싶었던 것이다. “네가 나처럼 이곳에 와서 행복해지길 바랐다”는 바람과 함께.
이날 방영분에선 노동전문가라 자처하는 호스피스 병원 청소노동자 최덕자(길해연 분)의 에피소드도 소개됐다.

최덕자는 퇴근길 동네서 마주친 여자에게 이상한 말을 듣는다. 자신이 병원 일을 더 이상 못하게 됐다고 하소연 했었단다. 이상한 여자다. 지금도 병원서 퇴근하는 중인데...
이상한 일은 또 있었다.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집 주방에 병원의 황영감 황차용(유순웅 분)이 있었다. 제 집처럼 편안히 물을 마시며. 당황한 채 살그머니 이끄는 차용을 따라가보니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들과 ‘내 남편 이름 황차용. 까묵지 말 것’이란 자필 메모가 보인다.
최덕자는 일상 중 남편만을 잊는 병증을 앓고 있었다. 내일이면 남편 황차용은 직장 동료 황영감이 되고만단다. 퇴근 후엔 다시 당황하고 그러면 차용은 다시 사진과 메모를 보여주고.. 그 기막힌 사실에 덕자는 남편을 향해 깊숙이 고개를 숙인다. “내일도 잘 부탁합니다.”
덕자의 병증은 치매는 아닌 모양이다. 해리성 기억상실 중 체계화 된 기억상실과 유사하다. 체계화 된 기억 상실은 특정 범주 또는 개인과 관련된 기억 상실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특정 사람과 관련된 모든 기억을 잊는 경우가 해당된다.
덕자의 에피소드는 겨레의 경우와도 연관된 느낌이다. 드라마가 진행돼 오며 몇 차례 등장한 강태식과 그 아들로 보이는 아이의 사진, 또 그와 연관된 태식의 회고, 아울러 “날 몰랐잖아요”란 겨레의 앙탈에 “알 수도 있지”란 태식의 독백까지.

드라마 속 분위기로는 겨레가 태식이 버린 아들일 것 같은데 겨레는 태식을 기억하지 못한다. 성장하는 아들을 오래 못 본 아버지가 못 알아볼 수는 있지만 완성된 외모로 늙어갈 뿐인 아버지를 아들이 못 알아보는 경우는 없다.
다만 겨레가 덕자와 마찬가지로 체계화 된 기억상실을 앓고 있다면 설명이 가능하다. 확실히 자신을 버린 아버지는 기억 속에서 지우고 싶을테니까.
그렇게 강태식과 겨레가 오래 전 헤어진 부자관계라면 “네가 나처럼 이곳에 와서 행복해지길 바랐다”는 태식의 바람은 남겨줄 것 별로 없는 아버지 태식의 마지막 소원일 것이다. 겨레가 팀 지니를 맡는다면 겨레는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도 이뤄주는 진정한 ‘지니’가 되는 셈이다.
사람들은 살면서 돈이 없어, 힘이 없어 고달파한다. 하지만 돈 욕심, 권력 욕심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 마실수록 갈증이 더해 간다.
그리고 삶의 마지막을 앞두고야 그 고달팠던 순간들조차 ‘그 것만으로도 충분했던’ 순간들이었음을 깨닫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때는 몰랐다’는 사실이 삶의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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