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재동 객원기자] 시쳇말로 ‘먹고 살자고’ 치열하게 살아왔다. 덕분에 프와그라가 됐건, 송로버섯이 됐건 세상의 진미라면 다 먹을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그런데 못먹는다. 환장할 일이다.
tvN 토일 드라마 ‘일타 스캔들’의 주인공 최치열(정경호 분)은 대한민국 교육 1번지 녹은로의 수학 1타 강사다. 연봉 탑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융자 없는 제 명의 건물이 몇 채에, 현강·인강·출판 등 경제적 부가가치 효과가 1조원에 달하는 ‘귀하신 몸’이다. 인기도 하늘을 찔러 수험생 및 학부모 세계에선 BTS급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물론 부작용은 있다. 걸려있는 송사가 수십 건에 그를 둘러싼 루머가 수백 개, 그에게 따라붙는 댓글만 수만 개다. 하지만 그런 건 문제가 아니다. 인기세로 치부하면 될 일이다. 정작 문제는 섭식장애다. 식사시간 불규칙한 거야 무수한 직군의 사회인들 사이에 새삼스런 일도 아닐테지만 먹으면 토하는 섭식장애는 최치열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구고 있다.
배고파서 먹으면 토하고 빈 속으로 자려니 잠도 못잔다. 못먹고 못잔 채 1타 강사의 숙명인 빼곡한 스케줄을 소화하려니 예민해지고 까탈스러워진다. 그런 그가 사람들로부터 멀어지는 건 당연하다. 그래서 외롭기까지 하다.
최치열에게 ‘밥’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보다 ‘리만가설’ 보다 난해하고도 치명적인 문제가 되고 말았다. 그 무렵 최치열 연구소 실장인 지동희(신재학 분)가 도시락 하나를 건넨다. 포장지엔 ‘국가대표 반찬가게’란 상호명이 박혀있다.

별 기대없이 토할 걸 감수하고 먹은 밥은 입에서 달았다. 또 놀랍게도 저항없이 식도를 넘어가 위에 안착한다. 음식물만 넘어오면 블로킹 하느라 요란법석 떨던 위장도 뜻밖에 잠잠하다. 어떤 양념인지는 모르겠지만 도파민이라도 뿜어내는 지 감미롭고 아련한 옛 향수조차 자극하는 듯 기분마저 달달하게 만든다.
그 훌륭한 식사는 꿀잠을 보장했고 상쾌한 컨디션을 불러왔다. 그렇게 ‘국가대표 반찬가게’는 ‘1조원의 사나이’ 최치열의 앞길을 비추는 서광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기꺼운 마음으로 찾아간 반찬가게에서 최치열은 못 볼 것, 아니 못 볼 여자를 보고 말았다.
‘오 마이 갓, 저 여자가 왜 저기에?’ 그 운수 나쁜 날, 치열은 스토커가 분명해 보이는 남자로부터 사진을 찍혔다. 삭제를 요청했지만 남자는 거부했고 그의 손에서 핸드폰을 낚아챘을 때 그녀가 나타났다. 그것은 피돌기를 멈추게 하는 포효였고 그녀는 맹수였다. 그 섬뜩한 살기 앞에서 치열은 갈팡질팡 초원을 내닫는 토끼일 수밖에 없었다.
그 소름돋는 기억에도 불구하고 치열은 먹어야 했다. 살아야 했다. 사전조사를 좀 했다. 여자의 이름은 남행선(전도연 분). 전직 국가대표 핸드볼 선수였다. 그 거친 질주, 그 범상치않은 손놀림이 설명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행선이 나라를 대표했던 체육인이건 말건 최치열은 먹어야 했다. 살아야 했다.

다행히 변장은 통했다. 남행선이라고 눈썰미마저 국대급은 아니었다. 그렇게 치열은 연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끝나지 않는 잔치는 없다고 했던가? 변장이 들통났다. ‘정말 끝이다’ 싶은 순간 천상의 옥음이 들려왔다. “최치열 선생님!” 이름은 모르지만 똘망똘망 답도 잘해 하이파이브까지 했던 학원제자였다.
치열은 놀랐다. 자신의 이름이, 아니 남해이(노윤서 분)란 학생 입에서 나온 자신의 이름이 이렇게 훌륭한 반향을 불러 일으키리라고는 정말 꿈에도 몰랐다. 남행선이라 쓰고 사자라 읽어야 마땅할 여자가 순식간에 토끼가 됐다. 반전있는 인생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최치열 인생의 유일한 장애물 ‘밥’이 구원으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치열은 절감한다. 인생에서 반전이란 것이 얼마나 소모적이고 쓸모없는 것인지. 남해이가 최치열이 몸담은 프라이드 학원의 ‘의대 올케어반’에 합격한 지 하루 만에 동네 학부모들의 치맛바람 탓에 탈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남행선은 다시 사자로 돌변했다. ‘프라이드 학원 임직원에 판매거부’란 카드를 빼들었다. 치열은 또 한번 절감한다. 먹고 사는 일은 이렇게도 힘든 일이었다.
남해이를 탈락시키면 본인도 참가를 거부하겠다고 배수진도 쳐보지만 통할 일이 아닌 줄은 치열도 잘 알았다. 그도 선생인데 자신을 믿어준 나머지 학생들을 어쩌란 말인가? 그래서 남행선에게 제의했다.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해이, 나랑 과외합시다!”

치열이 이렇게 행선의 손 맛에 애면글면 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굶주렸던 고시생 시절 치열은 행선모 정영순(김미경 분) 여사가 운영하던 ‘선이네 고시 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했다. 그때 먹은 밥은 단순한 끼니가 아니라 정이었고 위로였다. “돈 신경쓰지 말고 와서 밥 먹어. 배만 든든하면 뭐든 할 수 있으니 배 곯지 말아”라는 의미가 담긴 액면 그대로의 ‘집 밥’. 그 손 맛은 고스란히 행선에게 이어졌다.
‘선이네 식당’을 떠나서 1타 강사로 올라서기까지 치열이 먹어치운 밥에는 칼로리만 그득했을 것이다. 제 아무리 비싼 밥이래도 야망을 부추기는 회유, 꼬셔 먹자는 불순한 의도 따위 MSG만 그득 뿌려졌을 것이다. 섭식장애는 몸과 정신이 원하는 뱃속 따뜻한 정과 포근한 위로 없는 음식에 대한 거부감일 수 있다.
‘식(食)보다 학(學)이 중하다.’ 과열된 사교육의 현장인 녹은로의 통념이다. 학생들은 집 밥 아닌 편의점 밥에 익숙하고, 학부모들은 밥상 차리는 대신 학원 자리찜에 바쁘다. 그러다보니 집집마다 치열의 섭식장애 비슷한 질환들을 안고 산다. 공주병, 나만 최고 병, 너 밖에 없어 병, 전전긍긍 병 등 ‘홈 스위트 홈’이 사라지고 집밥이 사라지면 그렇게 장애들이 넘쳐나기 마련이다.
어쨌거나 드라마는 무거운 주제를 코믹발랄하게 풀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최치열과 남행선의 은밀한 거래,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 사교육 1번지 녹은로에 또 어떤 풍파를 몰고올 지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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