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하늘의 디바로..생전 故현미 마지막 부탁 "날 잊지말아요" [종합]
OSEN 김수형 기자
발행 2023.04.10 07: 43

 '스타다큐 마이웨이'에서  故현미를 추모하며 그녀가 생전 전했던 말을 재조명했다. 밤안개처럼 말없이 떠나갔지만 영원한 디바로 많은 이들의 마음 속에 기억될 그였다. 
9일 방송된 TV조선 '스타다큐 마이웨이'에서 故현미 추모특집이 전파를 탔다.
제작진은 지난 2022년 10월 9일에 출연했던  현미의 모습을 재조명했다.  싱글하우스에서 홀로 지낸 모습. 현미는 가장 좋아하는 상에 대해  "신영균씨가 준 예술문화대상가 가수협회 대상, 또 "한국대표 가수로 미국 40대 레이건 대통령 취임당시 노래 불렀다  워싱턴 디씨에서  불러, 바빴다"며 당시 상장도 공개했다. 

또 가수가 된 계기에 대해 현미는 "가수란 꿈 없어, 원래 무용수를 꿈꿨다 1950년도 후반, 미8군부대를 휘어잡던 김시스터즈, 무용연구소에서 알게 됐다"라며 "미군 클럽을 가자고 해 돈벌게 해준다더라거기서 칼춤과 부채춤 준비해, 갑자기 클래식 가수가펑크냈고 네가 대신 노래 한곡 부르라고 해, 노래 실력을 인정받아"며 그렇게 곡도 없이 아는 노래 부르다가 가수가 됐다고 했다. 무용수에서 현미가 탄생하게 된 것, 그렇게 인생을 바꾸게 된 현미였다. 
현미는 데뷔 때부터 60여년간 방송녹화본과 LP판을 집 고스란히 담아 간직했다.  방 한편에 켜켜이 가수인생이 쌓여있었다.  남편 고 이봉조와 함께 한 앨범부터 '밤안개' 수록 첫 앨범도 그대로 간직했다.밤안개 후 대스타가 된 현미. 독보적인 음색과 성량으로 60년대 최고의 가수로 등극했던 그였다. 
또  그는 남편이었던 천재 작곡가이자 히트곡 제조기인 故이봉조에 대해 "덕분에 스타가 됐다 히트송이 많아 , 나의 은인이자 스승, 애인이고 남편이다"며 애정을 보이며 살아생전 고 이봉조의 유품을 보물처럼 간직했다. 연애시절 받은 엽서가 자신의 보물1호라는 것.  고 이봉조의 필체가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연애 스토리에 대해 현미는 "매일 밤 매일 만났다. 그때 그 사람이 유부남인 줄 몰라,  나에게 총각이라고 했는데  알고보니 딸 둘 있던 유부남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이미 현미는 임신한 상태. 현미는 "결국 이별을 고했으나 술마시고 찾아와  야구 방망이로 살림을 부수기 시작했다, 잠옷바람으로 아들데리고 나와 헤어졌다"며  어쩔 수 없이 이혼을 선택했다고 했다. 
이후 급격히 건강이 안 좋아진 남편을 떠올린 현미는 "그렇게 놔두면 안될 것 같아 다시 함께 하기로 했는데 합가 약속 후 얼마 안 돼 심장마비로 떠나, 운명이 거기까지 였다. 지금 생각하며 너무 안 됐다"며 남편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리고 2018년 남편의 묘소를 찾은 현미가 그려졌다. 현미는 "혼자산지 40년, 너무 나쁘다 살았을 때 따뜻한 밥 한끼 먹어야지,  같이 대화하고 웃고 그래야지, 아무 소용없다"고 말하는 모습이 그려지기도.
또 이날 바쁜 생활 중에서도 둘재아들과 통화하며 웃음보가 터진 모습이 전파를 탔다. 50대가 넘어 돋보기 쓴 아들을 귀여워하는 모습. 영락없는 아들바보 엄마였다.  현미는 "인생은 잠깐이다, 행복하게 잘 살아라"며 당부를 전했다. 그러면서 현미는 "'내 걱정하지마'란 신곡 있어 긍정적 에너지 가득한 노래"라며 이 노래를 열창,  그녀의 인생관이 담긴 노래가 눈길을 끌었다. 
또 이날  고향동생인 이성남을 만났다.  같은 평양출신 동생이었다. 고향에서 같은 학교출신이라었다는 것. 현미는 "평양중앙방송 전속 합창, 연극단했다  모란봉극장에서 행사해, 김일성 수상했을 때 어린이 대표로 꽃다발도 줬다"며 평범하지 않았던 어린시절도 떠올렸다. 
이후 1.4후퇴 때 피난을 했다는 현미. 참혹했던 한국전쟁의 기억도 생생하게 전했다. 두 달간 철길만 따라 걸었다는 현미는 평양에서 대구까지 걸었다며 "사생결단으로 왔다"고 했다. 하지만 기습공습으로 챙기지 못한 동생과는 이산가족이 되었다며 아픈 가족사를 전하기도 했다.  현미는 "이북 공연 때, 5천불 지불해서 동생을 극적으로 몰래 만나, 장백에서 딱 7,8시간 만났다"며 "얼굴이 안 남아있어, 영양실조였다, 애석하게도 동생들을 데리고 올 수 없어 우울증 걸렸다,  환경 바꾸라고 해서 미국에서 살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오늘 현재가 중요하다 주어진 하루의 소중함을 안고 산다"고 말했다. 
생계를 위해 미8군에서 시작해  60년 넘게 대중을 위해 노래한 현미. 대중을 위로한 그녀의 깊은 울림은  그녀가 떠나도 계속되고 있다.
현미는 생전 인터뷰에서 "64년간 여러분들을 위해 노래하며 살아왔다,  그 길이 내 마이웨이"라며 "여러분들 기억에서 나를 잊지 마세요"라며 마지막 부탁을 남겼다.   비록 이젠 하늘나라의 디바가 됐지만  팬들에게는 영원한 디바로 가슴 속에 남을 현미.  우리의 영원한 디바로 불리며 여전히 애도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는 중이다.
한편 현미는 지난 4일 오전 85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했다. 현미의 장례일정은 사단법인 대한가수협회장으로 거행된다. 오는 11일까지 엄수되며, 조문은 7일 오전 10시부터 가능하다./ssu08185@osen.co.kr
[사진]  '스타다큐 마이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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