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재동 객원기자] 오래전 말했었다. “낭자가 철이 들면 내 낭자 놀리는 걸 그만두지.” 농처럼 얘기했지만 진담였다. 그 여인이 철이 들면, 그래서 놀리길 그만둘 때 즈음이면 가시버시가 돼있으리라 꿈꾸었었다.
하지만 마침내 여인이 철이 들었건만 종내 이별을 앞두었다. 도대체 네게로 가는 길은 왜 이다지도 아득하고 험한 것이냐!
28일 방송된 MBC 금토드라마 ‘연인’에서 이장현(남궁민 분)이 길채(안은진 분)를 떠나보냈다. 이번엔 장현 쪽에서 밀어냈다. 홍타이지(김준원 분)가 죽었다. 죽기 전 조선 포로문제를 각화(이청아 분)에게 일임했고 각화는 길채를 조선으로 보내지 않으면 이장현이 거둔 조선 포로들을 모두 죽이겠다고 경고했다. 용골대(최영우 분)도 말했다. “이제 조선 포로는 잊혀질 거야.”
하지만 장현에게 그들 하나하나는 잊혀질 수 없는 이들이다. 장현은 대납한 속환금을 갚겠다는 포로들의 각서를 하나하나 읽어본다. 어찌 이들이 잊혀진 채 죽어가야 된단 말인가? 그래서 길채를 떠나보내기로 했다.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그러니 내게 마음의 빚 같은 건 가질 필요 없어요. 나는 부인께 매달려도 봤고 부인 때문에 죽을 고비도 넘겼어요. 원없이 다 해 보았으니 이제 내 마음엔 아무 것도 남지 않았어요. 그러니 돌아가시오.”
마음에도 없는 소리다. 당연히 길채도 안다. 그래서 길채가 매달렸을 때 “게다가 매번 날 밀쳐내는 부인에게 질렸어요! 네! 이제 아주 싫증이 납니다. 그러니 돌아가시오 제발!” 질타를 위장해 호소도 해봤다.
하지만 길채가 완강하게 나왔다. “싫다면요? 만약 제가 돌아가길 원치 않는다면..” 길게 말이 이어져선 안된다. 또다시 갈피를 잃기 전에 일갈했다. “서방까지 있는 여인이 염치란 걸 모르시오?” 죽어도 입에 담기 싫었던 소리.
그제서야 길채도 알았다. 분명 마음에도 없는 소리다. 하지만 확실한 건 자신은 떠나야 된다. 종종이(박정연 분)에게 말했다. “조선에 가자. 그걸 원해. 원하는대로 해주고 싶어.”.
문을 사이에 두고 영이별을 고한다. “나란 여자 참 지긋지긋하지요? 어쩜 매번 나리께 폐만 끼치는지. 부끄럽고 한심하고..”
“난 한번도 그리 생각해 본 적 없소. 그러니 조선에 가거든 심양에서 겪은 고초따윈 다 잊고 잘 살아주오. 요란하고 화려하게, 길채답게...”
“예. 꼭 그리 살겠습니다. 목표가 생겼습니다. 다시는 나리께 폐가 되고 싶지 않아요. 네. 조선에 돌아가서 보란 듯이 씩씩하게 잘 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미안합니다.”
심양의 저자길 위로 길채가 떠난다. 혹시라도 그가 있을까 뒤돌아보고 뒤돌아보지만 장현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장현은 그렇게 멀어지는 길채의 뒷모습에 마지막 인사를 전한다. “잘 가시오. 가서 꽃처럼 사시오.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그뿐입니다.” 그리고 망부석이 된 채 그대로 밤을 맞는다. 별리. 그 슬픔의 체증에 굳어있는 장현 옆으로 각화가 다가온다.
“날 죽이고 싶겠지?” “예, 허락만 해주신다면..” “날 원망하겠지만 조선 포로를 잊은 건 조선사람들이야. 이젠 포로를 속환하러 오는 이도 없거든. 그러니 포로들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신경쓰는 사람들이 없지. 마치 부모없는 고아처럼. 내가 궁금한 건 왜 니가 그토록 목매는 여자를 그 하찮은 포로들 때문에 포기했는가야?”
하찮다고? 누가? 장현이 발끈할 때 각화의 말이 이어진다. “이장현은 하찮고 불쌍한 것들을 그냥 보아넘기지 못하거든. 무척 어리석게도...내 장담하는데 니 어줍잖은 동정심이 언젠가 네 발목을 잡을 거야.”
맞장구 쳐줄 기분이 아니어서 끝내려 했다. “글쎄요. 전 남 일은 관심 없습니다.” 그 말을 들은 각화가 누각 난간으로 주춤주춤 물러선다. 그러더니 몸을 기울여 추락하려 한다. 마치 ‘여기서 떨어지면 목뼈가 부러질거야. 상관하기 싫으면 내버려 둬!’란 기세다. 그리고 난간을 넘어가는 각화의 손을 잡아채는 이장현.
“그래 너는 떨어지는 사람을 건져주는 사내지. 허니 이장현, 나도 건져줄텐가? 무서워! 난 한번도 아버지가 없는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다. 내가 밉겠지만 그래도 잠시만 곁을 내줘. 부탁이야!” 이장현이 구할 자는 길채나 조선 포로만이 아녔던 모양이다. 그 어줍잖은 동정심에 각화는 기대고 싶은 거였고, 그 어줍잖은 동정심이야말로 장현이 체증을 다스리는, 길채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방편인 모양이다.
한양에서 길채를 맞은 구원무(지승현 분) 옆엔 배가 부른 채인 후처가 있었다. 고루하고 편벽한 구원무는 길채의 훼절여부에만 관심이 있다. 자해까지 하면서 정조를 지켰지만 어떤 상황에서건 자신을 소중히 대해 준 이장현에 비해 한없이 졸렬해 보인다. 구원무는 결국 이혼상소까지 올린 모양. 길채는 홀가분하게 치매 애비가 목을 조르고, 저자의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는 천박한 의미의 환향녀가 되기로 했다.
“예 심양에서 오랑캐에 팔려 갔었습니다. 거기서 참기 힘든 치욕을 당했지요. 이장현 나리도 만났습니다. 나리의 도움으로 속환됐어요. 오랑캐한테 욕을 당한 건 제 잘못은 아닙니다. 그 일로 이혼을 요구하셨다면 전 끝까지 물러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심양에서 이장현 나리께 마음을 준 것은 미안합니다. 해서 이혼하는 겁니다.”
길채도 더 이상은 17세기 조선의 백성임에 동의하지 않기로 한 모양이다. 드라마 초반 ‘군관의 무리 중 군관답지 못한 이’, ‘세자를 미혹하여 그릇된 일에 담기게 한 이’로 치부된 이장현에 이어 ‘오랑캐와 붙어먹고 낯 뻔뻔한’ 길채 역시 병자호란이 배출한 또 한 명의 이방인이 되고 말았다. 둘의 공통점이라면 ‘제 사정이 어떻든 사람에 대한 연민을 잊지 않는’ 정도의 수식이면 족할 것 같다.
17화 예고에서 소현세자의 귀환 길에 장현이 동행한다. 당연히 홀가분해진 길채와도 만난다. “내게도 매양 그립고 가고 싶은 곳이 있더군. 이제 천년만년 이리 살면 되겠어.”라 말하는 이장현. 하지만 못난 옛 세상이 과연 이 한 쌍 이방인들의 사랑을 두고만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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