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식어가는 계절 데운 따뜻한 드라마 [김재동의 나무와 숲]
OSEN 김재동 기자
발행 2023.11.07 10: 41

[OSEN=김재동 객원기자] 학창시절 문학평론가 김인환 교수의 강의를 들은 적 있다. 당시 김 교수로부터 ‘자세히 읽기(Close reading)’라는 독서법을 배운 것은 평생 잘한 일 중 하나다.
비슷한 시기에 ‘9마일은 너무 멀다’란 제목의 추리소설도 읽었었다. 해리 케멜먼이 쓴 이 소설은 우연히 내뱉어진 ‘9마일이나 되는 길을 걷는 것은 쉽지 않다. 빗속이라면 더욱 힘들다.’는 문장에 대한 해석과 추론을 거듭한 끝에 살인사건의 범인을 잡아내는 이야기다.
소설과 강의내용이 공교롭게 중첩되면서 ‘자세히 읽기’의 효용에 감탄한 기억이 있다.

OTT 넷플릭스 시리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이남규·오보현·김다희 극본, 이재규·김남수 연출)는 사람을, 환자를, 그리고 스스로를 자세히 읽으려 애쓰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라하 작가의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한다.
대학병원의 3년 차 내과 간호사 정다은(박보영 분)은 뜻밖에 정신건강의학과로 발령받는다. 그곳에는 자신을 잃어버린채 도움을 필요로 하는 많은 이들이 있다.
다은의 첫 환자는 양극성 장애를 앓고 있는 오리나(정운선 분). 남 부러울 것 없는 성장과정과 유복한 환경에 비춰 정신이 아플 이유가 없어 보이는 환자다. 그런 리나에 대해 정신과 의사인 황여환(장률)은 "뭔가를 넘치게 가졌다고 해서 정신병에 안 걸리나?"라고 반문한다.
실제로 오리나의 경우 차고도 넘쳤던 엄마(차미경 분)의 사랑이 문제였다. 스스로 아무 것도 결정해 본 적 없이 40대에 접어든 리나는 스스로를 잃었다. 엄마가 오리나에게 자신을 투영하지 않았다면, 오리나를 온전한 객체로 인정했다면, 아니 자신의 딸을 자세히 읽었다면 오리나의 장애는 발병하지 않았을 것이다.
상사의 가스라이팅에 시달려 극도의 사회불안장애를 앓고있는 조성식(조달환 분)을 담당할 무렵, 다은은 자신이 정신의학과로 발령받은 진짜 이유를 알게 된다. 환자 한 명 한 명에게 친절하고 자상했던 다은은 내과 동료 간호사들의 원망을 샀다. 업무가 지연되고 비교를 당하는 일상이 원망의 이유였다.
자신이 누군가의 민폐였단 사실을 알게 되면서 다은은 위축된다. 조성식처럼 불안증에도 시달린다.
드라마는 환자와 그들을 돌보는 의료진들을 동일선상에서 그려냄으로서 소외를 강요하는 현대 사회 속 누구도 정신병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명제를 부각시키는데 성공했다.
‘차기 수간호사감’이란 평을 듣는 민들레(이이담 분)는 오리나와 대비된다. 오리나가 엄마의 과한 사랑에 시달렸다면 민들레는 엄마(우미화 분)의 학대에 시달렸다. 하지만 두 사람은 엄마로 인해 스스로를 잃어버렸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민들레는 엄마로부터의 성공적인 독립을 위해 자신이 뭘 좋아하는 지도 모른채 대출 잘되는 안정된 직종 간호사를 선택했다.
워킹맘인 간호사 박수연(이상희 분)에게선 우울증을 자각못한 워킹맘 권주영(김여진 분)이 투영되었고 간호실습생 지승재(유인수 분)는 송유찬(장동윤 분)과 같은 공황장애에 시달리고 있다.
이외 대장항문과 의사 동고윤(연우진 분)은 손가락 마디가 굵어질 정도로 마디를 꺾어야 직성이 풀리는 강박 때문에 정신과 진료도 받는다.
드라마는 아예 주인공 정다은에게 우울증을 불러일으켜 보호병동에 입원시키기도 한다. 다은은 현실과 게임을 구분못하는 망상환자 김서완(노재원 분)에게 특별한 관심을 쏟았었다. 우울한 공시생 생활로 돌아가기 버거웠던 서완은 재발을 연기하지만 그를 눈치 챈 다은으로 인해 퇴원 수속을 밟게 되고 퇴원 후 다은에게 마지막 전화를 걸고는 투신한다.
애써 심상히 넘기려 해도 그 죽음은 아프게 다은을 좀먹고 급기야 우울증을 불러일으킨다. 정신병동 간호사에서 정신병동 환자로 전락한 다은. 자신이 환자들에게 행했던 언행을 환자로서 수용하며 반발하는 자신을 돌아본다. 그리고 깨닫게 된다. 자신 역시 스스로를 지켜내지 못했음을.
드라마는 우선 자신부터 자세히 읽어보자고 얘기한다. ‘나’란 말은 자기 자신을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구분해 준다. ‘나’라고 말할 때 비로소 독립적인 존재가 되며 이 유일무이한 개체성에 대해 자각하는 것이야말로 삶을 꾸려가는 첫 단추다.
그렇게 시작하는 세상살이지만 사회는 교묘한 방식으로 그 정체성을 연마해 나간다. 누군가에겐 사랑이란 당근을 내밀고 누군가에겐 소외란 채찍을 내리치며. 그 속에서 오롯하자면 자신을, 그리고 상대를 자세히 읽을 필요가 있다. 뻔뻔한 저항도 필요하다.
드라마는 이 묵직한 주제를 생활감 있는 에피소드들 속에 녹여내는데 성공했다. 과하지 않은 연출과 함께 박보영, 연우진, 장동윤, 이이담, 이정은 등 출연진의 캐릭터에 스며든 생활 연기가 크게 한 몫 했다. 식어가는 계절에 만난 따뜻한 드라마라서 많이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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