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재동 객원기자] 시놉시스는 그를 ‘한 나라의 모든 권세를 가졌으나 마음은 한없이 비천한 임금’이라 표현했다.
21일 방송된 tvN 새 토일드라마 '세작, 매혹된 자들'(김선덕 극본, 조남국 연출)의 주인공인 진한대군 이인(조정석 분)을 설명한 대목이다. 하지만 극중 이인의 스승이자 영의정인 강항순(손현주 분)은 딸 강희수(신세경 분)에게 다음과 같이 진한대군을 설명한다.
“천하를 호령하고 휘어잡을만한 재주와 위세를 지닌 분이시다. 그래서 위태롭고 위험하다. 또한 안타깝고 안쓰럽다. 지존의 자리엔 오를 수 없는데 지존의 숙명을 타고났어. 대군께선 뜻이 없으셔도 역심을 품은 자들이 부나방처럼 달려들 것이다.”이에 대해 강희수는 “걱정마세요, 아버지. 대군께선 그런 자들에게 휘둘릴 분이 아니셔요.”라고 옹호한다.
시놉시스가 제시한 ‘마음이 한없이 비천한’ 이인은 그를 가르친 강항순 입에서 일세의 영웅처럼 묘사된다. 아마도 이 괴리감이 드라마가 이인에게 부여한 페이소스의 정체인 모양이다. 지존의 자리엔 오를 수 없는데 지존의 숙명을 타고났다? 신분에 안주하면 숙명이 그를 볶아세울 것이고 숙명을 따르면 신분이 그를 닦달할 것이다.
결국 이인은 한 나라의 모든 권세를 가진 임금이 되는 듯 한데 그 반대급부로 마음이 한없이 비천해질 모양이다.
인조시대를 차용하여 소현세자와 수양대군을 섞어 놓은 듯한 캐릭터 이인은 1, 2화 연속 방송된 드라마 초반부엔 여전히 연민할 줄 아는 왕족, 충성스런 신하, 기개있는 대장부로 그려졌다. 고결한 품성의 소유자로.
청나라에서의 오랜 볼모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이인은 자신에게 씌워진 ‘예친왕의 세작’이란 프레임이 몹시 곤혹스럽다. 딴에 조선을 위하고 백성들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건만 조선에서 자신은 부청배로 낙인 찍혀있었다.
눈물로 끌어안고 볼모길을 배웅했던 형님 전하 이선(최대훈 분)은 “너만 보면 역겨워 병이 도질 것 같다”며 문안인사도 거부하고 그에 따라 중신들의 시선도 냉랭하기 그지없다.
의욕없이 한량으로 소일하다 우연히 찾은 내기 바둑판에서도 마찬가지다. 수근대는 뒷담화 모두 자신을 경멸한다. 나서기도 머쓱하고 듣기도 귀가 괴로워 슬며시 뜨려는 차 “염병!” 소리가 발목을 잡는다.
남장 내기 바둑꾼 행색으로 청에 끌려간 포로 속환금 마련을 위해 전전하던 강희수는 물색 모르고 떠드는 중인들의 뒷담화가 귀에 거슬린다. 염병할 일이다. “진한대군이 청나라 가고 싶어 갔나? 갖은 고생 끝에 겨우 살아온 분께 뭐라고 세작?..서슬퍼런 오랑캐 땅에서 그럼 황제의 뜻을 따라야지. 알량한 자존심 내세워 황제를 거역하면 끌려간 포로들, 이 나라 백성들이 제일 손해고 온 나라가 또다시 오랑캐에 짓밟힐텐데.. 염병!”
눈물나도록 고맙다. 생면부지면 어떠랴. 자신을 알아주는 저 사내라면 지음(知音)이 될 만하다 싶어 뒤를 쫓는다. 마침내 잡아챈 곳이 기루 앞. 그곳에선 한바탕 난장이 벌어진다. 병조판서 김종배(조성하 분)의 명으로 이인의 행적을 밟던 예조좌랑 이현보(양경원 분)가 환향녀인 여동생 홍장(한동희 분)의 기루를 찾아 행패를 부리고 있었던 것. 이에 분기탱천한 희수가 바둑판을 내던지며 끼어들어 보지만 삽시간에 위기에 봉착하고 이때 이인이 나서 이현보를 내쫓는다.
그제서야 이인이 진한대군임을 알게 된 희수는 당황한다. 바둑으로 입신의 경지에 올랐다는 남자다. 예친왕과 담판 지어 포로송환을 수월케한 의인이다. 얼마나 동경했던 이인가. 그런 남자 앞에서 ‘염병’소리를 숱하게 주워섬겼다. 다시 볼 낯이 없다.
희수가 그러거나 말거나 이인과의 재회 기회는 이현보의 수하들이 마련해줬다. 윗전의 수모를 보복하려던 무리들에게 곤욕을 치를 뻔한 순간 다시 등장한 이인이 희수를 대신해 칼을 맞는다. 그리곤 말한다. “다행이다. 니가 아니라 내가 칼을 맞아서.”
통증을 잊자는 핑계로 대국을 청해오는 이인과의 승부. 승부가 희수의 한집 승으로 끝났을 때 밖엔 자욱하게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랜만의 몽우(濛雨)구나! 자욱하게 내리는 가랑비를 몽우라 하지. 내가 아끼는 별호다.” 몽우라니. 얼마나 다감한 말인가. 저 남자가 아끼는 별호라니.. 내가 갖고 싶다. 저 남자의 입으로 내가 그리 불리고 싶다. 희수는 승리의 대가로 몽우란 호를 적아 달라 청한다. “이제부터 넌 몽우다. 내 망형지우!”
이제부터 저 이와 나는 마음으로 사귀는 사이다. 가슴이 뛴다. 얼굴이 달아오른다. 홍장은 진한대군에게 반한 거라고 말해준다. 그래선가. 먼 발치에서 본 이인을 지나칠 수 없었다. 무심결에 쫓게 된다. 그 곳에서 다음 보위를 도모하자는 영중추부사 박종환(이규회 분) 등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부하는 이인의 모습은 또 얼마나 대장부다운가. 호감이 짙어진다. 아버지에게도 물어본다. “진한대군은 어떤 분이십니까?” 했더니 사내중에 사내란다. 슬몃슬몃 웃음이 배어나온다.
이인과의 대국에서 희수의 한 집 승은 사실 억지다. 희수가 흑을 잡았으니 ‘덤’을 공제해야 한다. 이인은 바둑에서 이기면 돌을 징표로 챙긴다는 희수의 습관을 듣고는 개울가에서 하얀 자갈을 주워 건넨다. 희수는 지난 대국은 정작 자신의 패배니 다음 대국서 이기면 받아가겠다며 그 돌을 맡아달라고 청한다. 그렇게 희수의 마음은 이인의 도포자락에 들어갔다.
아름다운 시작이다. 다시 돌아왔을 때 모든 게 이대로였으면 좋겠다 싶을 만큼. 하지만 아름다우면서 빨리 지는 것은 봄날의 꽃만은 아니다.
인심난측(人心難測)이라서 이인에게 부여된 지존의 숙명은 그를 정국의 소용돌이에 밀어 넣어 그 맑은 마음에 분탕질을 칠 것이다. 본말이 전도된 명분으로 미혹시킬 것이며 자신에게 유리한 결과를 위해 과정을 외면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하여 “대군께선 휘둘릴 분이 아니셔요.”라는 희수의 믿음도 몽우 속에 흐릿해질 지 모르겠다. 아우를 사랑했던 임금 이선이 아우 이인을 증오하기까지 그리 긴 세월이 필요하진 않았다.
바둑은 세상 이치와 같다고들 한다. 기리(棋理)에 순응하여 돌을 움직이면 승부가 따르지만 기리를 망각해 행마를 소홀히 하는 자에겐 승부가 있을 수 없다.
터무니 없을 만큼 온전하길 바라진 않지만 드라마가 끝났을 때 이인과 희수 두 사람에게 이 아름다운 시작의 흔적만큼은 남아있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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