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감동을 안겼던 ‘고려거란전쟁’이 제작진과 원작자·시청자의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공영방송 50주년 특별 기획 KBS2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극본 이정우, 연출 전우성 김한솔 서용수)은 최고 시청률 10.2%(15회)를 기록하고, 2023 KBS 연기대상에서 대상(최수종)을 포함한 7관왕에 오르며 대하 드라마의 저력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16화에서 퇴각하는 거란군을 공격해 포로들을 구출하고 장렬하게 전사한 양규(지승현), 김숙흥(주연우)은 뜨거운 감동을 선사했다.
하지만 17회부터 개경으로 돌아온 현종(김동준)이 호족 세력을 혁파하는 과정이 그려지면서 원작과는 다르고, 실제 역사 고증을 무시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현종이 강감찬(최수종)과 갈등 후 낙마 사고를 겪는 과정이 캐릭터를 붕괴시켰다는 지적을 받았고, 원작자 길승수 작가도 원작과는 다르게 가고 있다고 비판하며 도마 위에 올랐다.
이에 KBS 측은 이례적으로 ‘고려거란전쟁’의 탄생기를 공개하며 수습에 나섰다. 전우성 감독에 따르면 2022년 상반기 판권 획득 및 자문 계약을 맺고 이후 제작 과정에서 드라마에 등장하는 전쟁 씬 및 전투 장면의 디테일을 소설 ‘고려거란전기’에서 참조했다. 또한 이정우 작가가 합류하면서 이야기의 방향성과 맞지 않아 자문팀을 새로 꾸리고 1회부터 스토리 라인 및 씬별 디테일에 촘촘하게 의견을 받아 대본을 집필했다. 이게 원작과 ‘고려거란전쟁’이 다른 이유였다.
‘고려거란전쟁’ 제작진은 “고려의 황제 현종이 그의 정치 스승 강감찬과 고려를 하나로 모으기 위해 어떤 리더십을 펼쳐나갈지 기대해 달라. 또한 귀주대첩이 발발하기까지의 고려와 거란의 외교정책과 이를 둘러싼 다양한 인물들의 갈등과 대립까지 다채로운 스토리로 찾아뵐 테니 많은 기대와 응원 부탁드린다”고 당부했다.
하지만 원작자 길승수 작가가 다시 한번 들고 일어났다. 길승수 작가는 “2022년 6월경 처음 참여했을 때 확실히 제 소설과 다른 방향성이 있었다. 그 방향성은 ‘천추태후’가 메인 빌런이 되어서 현종과 대립하며 거란의 침공도 불러들이는 스토리였다. 화들짝 놀라서 그런 역사 왜곡의 방향으로 가면 ‘조선구마사’ 사태가 날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포기됐는데 원정왕후를 통해 어느 정도 살아 남았다”고 지적했다.
이에 전우성 감독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전 감독은 “드라마 원작 계약은 매우 다양한 형태가 존재합니다. 원작의 설정, 줄거리를 그대로 따르는 리메이크 형태부터 원작의 아이디어를 활용하기 위한 계약까지 다양합니다. ‘고려거란전쟁’ 원작계약의 경우는 리메이크나 일부분 각색하는 형태의 계약이 아니었습니다”라며 “소설 ‘고려거란전기’는 이야기의 서사보다는 당시 전투 상황의 디테일이 풍성하게 담긴 작품입니다. 꼭 필요한 전투 장면을 생생하게 재현해보고자 길승수 작가와 원작 및 자문계약을 맺었고 극 중 일부 전투 장면에 잘 활용하였습니다. 하지만 길승수 작가는 이정우 작가의 대본 집필이 시작되는 시점에 자신의 소설과 ‘스토리 텔링의 방향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고증과 관련된 자문을 거절하였고 수 차례 자문에 응해줄 것을 요청하였지만 끝내 고사하였습니다. 이후 저는 새로운 자문자를 선정하여 꼼꼼한 고증 작업을 거쳐 집필 및 제작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길승수 작가가 저와 제작진이 자신의 자문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기초적인 고증도 없이 제작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에 당혹감을 느낍니다”고 말했다.
이어 “길승수 작가가 자신만이 이 분야의 전문가인 것처럼 말하는 것에도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 드라마의 자문자는 역사를 전공하고 평생 역사를 연구하며 살아온 분입니다. 참고로 작년 여름, 소설 ‘고려거란전기’는 ‘고려거란전쟁’으로 제목이 바뀌어 재출간되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이정우 작가도 입장을 밝혔다. 이정우 작가는 “ ‘고려거란전쟁’은 소설 ‘고려거란전기’를 영상화할 목적으로 기획된 것이 아닙니다.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은 KBS의 자체 기획으로 탄생했으며 처음부터 제목도 ‘고려거란전쟁’이었습니다”라며 “이 드라마의 작가가 된 후, 원작 소설을 검토하였으나 저와는 방향성이 맞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렸고, 그때부터 고려사를 기반으로 처음부터 이야기를 다시 설계했습니다. 제가 대본에서 구현한 모든 씬은 그런 과정을 거쳐 새롭게 창작된 장면들입니다. 시작부터 다른 길을 갔고 어느 장면 하나 일치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건 원작 소설가가 가장 잘 알 거라 생각합니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 작가는 “처음부터 별개의 작품이었기 때문에 사실 원작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합니다. 그런데도 원작 소설가가 ‘16회까지는 원작의 테두리에 있었으나 17회부터 그것을 벗어나 이상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의도를 모르겠습니다”라며 “이 드라마는 일부 전투 장면 이외에는 원작 소설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1회부터 그랬고 마지막 회까지 그럴 것입니다. 자신의 글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면 다른 작가의 글에 대한 존중도 있어야 합니다. 원작 소설가가 저에 대한 자질을 운운하며 비난하는 것은 분명 도를 넘은 행동입니다. 그런식이라면 저도 얼마든지 원작 소설을 평가하고 그 작가의 자질을 비난할 수 있습니다. 다만 제가 그러지 않는 것은 타인의 노고에 대한 당연한 존중 때문입니다. 이 드라마를 어떻게 구성하고 이끌어가는지는 드라마 작가의 몫입니다. 저는 제 드라마로 평가받고 소설가는 자신의 소설로 평가받으면 되는 일입니다”고 강조했다.
길승수 작가와 시청자들의 비판에 ‘고려거란전쟁’ 제작진이 결국 입을 열었고, 여기에 다시 길승수 작가가 폭로를 더하며 진흙탕 싸움이 되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서로에 대한 존중이 필요한 시점이지 않을까. /elnino8919@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