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중요한 사람은 피해를 입은 사람이다. 우리는 손흥민의 지시를 따를 것."
엔지 포스테코글루 토트넘 홋스퍼 감독이 실제로 했던 말이다. 그러나 토트넘의 선택은 로드리고 벤탄쿠르(27)의 7경기 출전 금지 징계에 대한 항소였다.
토트넘은 20일(이하 한국시간) 구단 홈페이지를 통해 "클럽은 벤탄쿠르 징계에 항소한다. 우리는 이번 주 초에 발표된 영국축구협회(FA)의 벤탄쿠르 출전 정지 기간에 대해 항소한 걸 확인할 수 있다"라고 성명을 발표했다.
이어 토트넘은 "독립 규제 위원회가 내린 벤탄쿠르의 유죄 판결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로 인한 제재가 가혹하다고 믿는다. 벤탄쿠르는 항소가 진행되는 동안 국내 경기 출전 금지 상태가 유지된다. 우리는 이 기간에 더 이상 언급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설마 했던 일이 현실로 일어난 것. 앞서 영국 '텔레그래프'는 토트넘이 벤탄쿠르의 7경기 출전 금지가 지나치다고 생각하고 있다며 항소 가능성을 제기했다. 유죄 판결 자체에는 불만이 없지만, 그 처벌이 과하다는 주장이다.
매체는 "토트넘과 벤탄쿠르가 본보기가 되었으며 손흥민의 지지와 벤탄쿠르 본인의 사과가 불리하게 작용했다는 믿음이 존재한다"라며 "토트넘은 판결에 항소할 권리가 있으며 다음 단계를 고려 중이다. 토트넘 구단은 따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다소 당황했으며 불만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라고 전했다. 그리고 토트넘은 실제로 FA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했다.
벤탄쿠르가 억울한 징계를 받은 건 절대 아니다. 그는 지난 18일 팀 동료이자 주장인 손흥민을 향한 인종차별로 징계를 받았다. FA는 "독립 규제 위원회는 벤탄쿠르에게 미디어 인터뷰와 관련한 FA규정 E3를 위반한 혐의로 7경기 출전 정지와 10만 파운드(한화 약 1억 7,600만 원)의 벌금을 부과했다"라고 발표했다.
지난 6월 벤탄쿠르가 뱉은 말이 문제가 됐다. 당시 그는 자국 우루과이의 TV 프로그램 '포르 라 카미세타'에 출연했고, 진행자로부터 한국 선수 유니폼을 부탁받았다. 그러자 벤탄쿠르는 "쏘니?(손흥민의 별명)"라고 되물은 뒤 "손흥민 사촌의 유니폼일 수도 있다. 그들은 모두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라며 웃음을 터뜨렸다. 진행자도 맞장구를 치며 함께 웃었다.
아시아인은 모두 비슷하게 생겼다는 뜻이 담긴 명백한 인종차별 발언. 논란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러자 벤탄쿠르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쏘니 나의 형제여! 일어났던 일에 대해 사과할게. 그건 정말 나쁜 농담이었어. 나는 당신을 정말 사랑하고, 절대 당신이나 다른 사람을 무시하거나 상처 주지 않을 것이란 걸 알아줬으면 해! 사랑해 형제여"라며 사과문을 올렸다.
'나쁜 농담'이었다는 석연찮은 사과에도 손흥민은 벤탄쿠르를 용서했다. 그는 "벤탄쿠르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실수를 했고, 이를 알고 있다. 사과도 했다. 일부러 모욕적인 말을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는 형제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우리는 이번 일로 하나가 됐다"라는 글을 올렸다.
실망스러운 건 토트넘의 대응. 토트넘은 손흥민이 먼저 나서기 전까지 침묵만을 지켰다. 그러다 손흥민이 움직이자 뒤늦게 "문제가 긍정적인 결과에 이르도록 지원하고 있다. 선수들에게 다양성, 평등 등과 관련한 추가적인 교육을 실시하는 것이 포함될 것이다. 우리는 손흥민이 문제가 해결됐다고 여기고 팀이 새 시즌에 집중할 수 있도록 전적으로 지원할 것"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구단 내부 징계도 없었다. 오히려 '피해자' 손흥민의 뜻에 맡기겠다며 발을 뺐다. 포스테코글루 감독은 "가장 중요한 사람은 손흥민이다. 그가 우리를 안내하고 이끌 것이다. 문제를 처리하고 있고, 추후 추가 조치가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라며 "하지만 가장 중요한 사람은 피해를 입은 사람이다. 이번 경우엔 손흥민이다. 우리는 그의 지시를 따를 것"이라고 일을 넘겼다.
신중한 판단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손흥민의 결정에 맡기겠다는 책임회피성 발언으로 들릴 수 있다. 감독이나 구단 차원에서 먼저 나서서 명확히 문제를 정리하고 인종차별에 선을 긋는 역할을 기대했지만, 그런 얘기는 일절 없었다. 영국 현지에서도 웃음 가스를 마신 이브 비수마에 대한 공개 비판 및 징계와는 다른 이중적인 태도라는 비판이 나온 이유다.
게다가 토트넘은 벤탄쿠르의 FA 징계에도 항의하기로 택했다. FA 규정에 따르면 인종차별 행위에 대한 징계는 최소 6경기 출장 정지부터 시작하기에 7경기면 엄청난 가중 처벌도 아니다. 그럼에도 토트넘은 징계 기간을 한 경기라도 줄이기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것. '피해자' 손흥민 보호에 미온적이던 태도와는 정반대다.
무엇보다 문제인 건 벤탄쿠르가 아직도 자기 잘못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사실. 이미 두 번째 사과문부터 조짐이 있었다. 벤탄쿠르는 "다른 누구도 아니라 손흥민을 언급했던 인터뷰", "나는 절대 절대 다른 사람을 언급한 적 없다. 오직 손흥민뿐이었다" 등의 해명으로 잘못을 덮는 데 급급했다.
심지어 벤탄쿠르는 FA 조사에서도 말도 안 되는 변명만 늘어놨다. '디 애슬레틱'에 따르면 그는 제출한 진술서를 통해 자신의 발언이 인종차별이 아니라 '일반화된 표현'을 사용한 기자를 지적하는 가벼운 농담이었다고 주장했다. 손흥민을 '그 한국인'이라고 부른 걸 부드럽게 꼬집는 표현이었다는 것.
또한 벤탄쿠르는 손흥민에게 한 사과도 자신의 일부 발언만 보도된 것에 대한 사과였다고 발뺌했다. 자기가 한 말에 대해 사과한 게 아니라 인터뷰 진행자의 발언이 생략되어 보도됐기 때문에 사과했다는 이야기다. 또한 벤탄쿠르는 사생활이 보장될 것이며 기자가 더 신중하게 영상을 올릴 것이라고 기대했다고 항변했다.
물론 위원회는 전혀 납득하지 않았다. FA는 벤탄쿠르가 '모욕적인 언어'를 사용했다며 출신이나 피부색, 인종, 국적 및 기타 특성을 언급했기 때문에 가중 위반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그럼에도 항소를 결정하며 '가해자' 벤탄쿠르를 감싸안는 듯한 메시지를 남긴 토트넘. 지금 해야 할 건 출전 정지를 1경기 줄이려는 이의 제기가 아니라 벤탄쿠르에게 뭐가 잘못인지 제대로 짚어주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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