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의 땅’을 말하기 전에 2023년 10월 12일 경기도 여주시 마임비전빌리지에서 있었던 일을 먼저 기억해야 한다. 당시 기아는 이름도 생소한 행사를 열었다. ‘2023 기아 EV 데이’였다.
국내 자동차 기자들을 상대로 EV 시대 변환의 청사진을 제시하는 자리였다. 기아는 중국 생산 모델이자 준중형 전동화 SUV인 EV5를 공개했고, EV4 콘셉트, EV3 콘셉트도 공개했다. 장차 기아가 완성해 나갈 전기차 풀 라인업이다.
행사를 주관한 인물은 송호성 기아 사장이었다. 송호성 사장의 막힘 없는 전개는 인상적이었다. 전동화를 비추는 청사진은 뚜렷했고,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송 사장의 대답은 시원시원했다. 전략은 물론이고 기술과 재무까지 어떤 분야의 질문에도 피해가는 법이 없었다. 망설임없이 쏟아내는 대답에는 강한 자신감이 깔려 있었다. 이날 행사에서의 인상이 얼마나 깊었던지 송호성 사장은 이듬해 ‘한국자동차전문기자협회’가 주관하는 ‘올해의 차’ 시상에서 ‘올해의 인물’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로부터 1년 하고도 4개월이 흘렀다. 비슷한 분위기가 스페인의 타라고나(Tarragona)에서 재연됐다. 스페인 동북부에 있는 타라고나는 바르셀로나에서 지중해 해안길을 따라 서쪽으로 100km를 달리면 나오는 유서 깊은 도시다.
스페인 현지시간 2월 24일, 타라고나의 타라코 아레나(Tarraco Arena)에서 ‘2025 기아 EV 데이’가 열렸다. 타라코 아레나는 ‘카스텔’이라고 하는 스페인의 유명한 ‘인간탑 쌓기 축제’가 열리는 장소다.

2023년의 ‘EV 데이’와 크게 다른 점이 있었다. 이번에는 한국 기자보다 해외 기자들이 훨씬 많았다. 한국에서도 대규모라 할 수 있는 40명의 취재진이 현장을 왔지만, 그 보다 훨씬 더 많은 해외 기자들이 자리했다. 유럽 지역에서 100여 명이 북미와 아시아 등지에서 50여 명의 기자들이 왔다. 행사장은 전 세계에서 몰려 온 200여 명의 자동차 기자들로 북적였다.
세계 전기차 시장은 2023년에 비하면 열기가 식어 있다. 캐즘이라고 하는 달갑지 않은 현상이 전동화 전략을 천명한 글로벌 자동차 제조사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국내외를 가릴 것 없이 자동차를 다루는 기자들이라면 “기아가 왜 이 시점에?”라는 질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송호성 사장의 대답은 이번에도 단호했다. “성장이 조금 정체된 면이 있지만 향후 더 시장이 커질 것으로 생각된다. 기아의 EV 전략은 지속적으로 EV를, 특히 볼륨 EV를 소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대답은 분명했지만 전기차 캐즘은 송호성 사장에게도 고민거리였다. 기아 내부 사정을 들어보니 기아는 당초 2024년 말에 두 번째 ‘EV 데이’를 계획했다고 한다. 하지만 전기차를 둘러싼 제반 여건들이 녹록지 않아 행사 시기가 2월말로 미뤄졌다.
기아가 EV 전략을 고수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시기의 문제일 뿐, 전기차 시대는 반드시 오게 돼 있기 때문에 지금 그 준비를 하지 않으면 대응력을 잃게 된다는 논리다.
송호성 사장이 ‘볼륨 모델’을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송 사장은 “기아는 우선 EV9과 EV6 같은 탑 세그먼트 모델들을 먼저 출시했다. ‘얼리 어답터’들에게 어필하는 모델들이다. 이제는 얼리 머조리티(Early Majority)들을 시장에 끌어들어야 할 시기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가격 경쟁력을 지닌 볼륨 모델이 시장에 등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송호성 사장의 이 논리가 스페인의 타라고나에서 ‘2025 기아 EV 데이’를 개최한 핵심적인 이유가 됐다. 물론 스페인은 “유럽은 중국을 제외하고 전기차에서 앞서가는 지역이다. 유럽 고객은 환경 측면에서 관심이 높아서 앞으로도 전동화가 가장 빠른 지역 중 하나일 것이다. 유럽 중에서도 스페인은 와인도 좋고 음식도 좋아 EV 데이를 하기에 최적이다”는 이유도 있다.

기아는 ‘2025 기아 EV 데이’에서 유럽 전략 모델 ‘EV2’ 콘셉트를 공개했다.
송호성 사장은 “EV2는 특히 유럽에서 굉장히 중요한 볼륨 모델이다. 3만 유로 초반대의 가격대가 형성될 이 차는 볼륨이 10만 대 이상으로 잡혀 있다. EV2는 정확히 얼리 머조리티(Early Majority) 고객들을 타깃으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아는 이번 EV 데이에서 ‘전동화 시장의 흐름 전환(Turn the tide)’을 주제로 ‘더 기아 EV4(The Kia EV4)’ ‘더 기아 PV5(The Kia PV5, 이하 PV5)’ 등 양산차 2종과 ‘더 기아 콘셉트 EV2(The Kia Concept EV2) 등 콘셉트카 1종을 세계 최초로 선보였다.
이와 함께 PBV 전용 플랫폼 ‘E-GMP.S(Electric-Global Modular Platform for Service, 개발명 eS)’, 소프트웨어 솔루션, 제조 부문 등 3가지 혁신이 담긴 PBV 비즈니스 전략도 공개했다.

송호성 사장은 ‘2025 기아 EV 데이’에서 허투루 넘겨버릴 수 없는 약속 한 가지도 했다. 전기차 시장의 ‘레이트 머조리티(Late Majority)’를 언급하면서 “레이트 머조리티 고객들은 더 작은 차, 더 저렴한 차를 원할 것이다. 기아는 내부적으로 엔트리 EV 모델을 어떻게 제시해야 할 지 계속 생각하고 있다. 더 작고 저렴한 엔트리 EV 모델을 아마 다음 기아 EV 데이에서는 보여드릴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어쩌면 엔트리 모델의 구상이 끝나 있는 지도 모른다. ‘2023 EV 데이’를 돌이켜 보면 송호성 사장이 제시한 ‘약속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기아는 ‘EV4’를 콘셉트카 형태로 공개한 바 있다.
그랬던 2023년의 ‘EV4 콘셉트’가 2025년의 ‘EV 데이’에서는 떡하니 양산형 모델이 되어 무대에 올랐다. 내장 디자인은 현실화 과정을 거쳤지만 외장 디자인은 콘셉트의 원형 거의 그대로 양산형이 돼 있었다.
송호성 사장의 EV 전략은 매우 논리적이고 구체적이었지만 여전히 현장의 기자들은 좀처럼 우려를 거두지 않았다. 그 우려에 대해서도 송호성 사장은 솔루션을 갖고 있었다. 바로 생산 시스템의 유연성이었다.
송 사장은 “광명에 EVO 플랜트라고 작년에 만든 공장이 있다. EV3와 EV4 모델을 만드는 전용 공장이다. EV3 EV4는 볼륨 EV 모델이기 때문에 두 차종만 가지고도 충분히 물량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EV3가 유럽에서 한 달에 5000대 이상씩 팔리고 있고 국내에서도 연간 2만 5000대 이상 팔리기 때문에 광명 EVO 플랜트의 15만 대 공장 캐파 운영에는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본다”고 전제한 뒤 “나머지 공장들은 전부 다 혼류 체계이기 때문에 전기차가 가는 속도에 따라서 내연기관과 전기차의 속도조절을 할 수 있다. 그런 유연성 있는 공장 체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흐름에 맞게 적절히 대응하면 큰 무리 없다고 생각한다”고 분명히 말했다. /100c@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