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이면 한국야구박물관(명예의 전당)이 탄생할 전망이다. 그동안 말이 많았던 야구박물관이 부산 기장군에 올 여름 착공 예정으로 2026년 개관할 전망이다. 박물관에 들어갈 소장품은 그동안 수집이 많이 돼있는 상태이고 그곳에 한 자리를 차지할 명예의 전당도 이제부터 준비해야 한다. 오센(OSEN)은 특별기획으로 명예의 전당(Hall Of Fame) 주인공이 될 레전드 스타들을 찾아 인터뷰한다. 또한 한국야구 미래를 책임질 기대주(Hope)를 찾아갈 예정으로 가칭‘KBO 호프를 찾아서’시리즈를 연재한다. [편집자주]
197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까지 한국야구를 논할 때면 김재박(71) 전 감독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선수로서 빼어난 기량으로 레전드 반열에 오른 것은 물론 감독으로서도 한국시리즈 4회 우승이라는 업적을 남긴 대스타였습니다. ‘그라운드의 여우’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김재박 감독을 만나봤습니다.(1편)
-대학교 1학년 때까지 나는 야구 선수도 아니었다. 체격도, 체력도, 실력도 뭐 하나 내세울만한 것이 없는 선수였다. 그러나 '나를 외면한 서울 소재 대학의 야구팀에는 절대지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훈련에 매진했다(김 감독은 순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의외로 내적으로는 ‘독종’의 면모가 있다)-
=2016년 KBO 경기감독관을 끝으로 야구장에는 잘 안보이시던데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십니까. 어느 덧 70대에 들어섰는데 지금도 골프나 당구는 종종 치시나요.
▲보시다시피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파머머리에 균형잡힌 체형이 10년 이상 젊게 보였다) 지인들과 골프나 당구도 종종 치고 웨이트 등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야구 생각도 꾸준히하고 지켜보며 지도자로서 후배들을 가르칠 기회가 있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당구는 고교시절 집건물에 있던 당구장에서 일찍 배워 700점으로 고수이고 골프도 특유의 야구선수시절 타격폼으로 70대를 기록했던 싱글골퍼이다)
=먼저 선수시절부터 여쭤보겠습니다. 감독님도 대기만성형 선수로 알려져 있습니다. 선수시절 돌아볼 때 야구선수로 성공을 거두게 된 가장 큰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나만의 비결이라면.
▲대학 1학년때까지 저는 그야말로 야구선수로는 많이 부족했습니다. 키도 팀내에서 제일 작았고 힘도 없고 어깨도 약했습니다. 달리기도 제일 못했습니다. 그러니 타격이나 수비, 주루플레이가 제대로 안됐죠.
대구에서 유치원 다닐 때 선생님과 캐치볼을 주고 받을 정도로 어린시절에는 제법 소질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이후 작은 키와 힘이 딸려서 제대로 실력발휘를 못했죠. 그래서 고교 졸업 후 서울에서 다시 대구 영남대로 내려가는 기차안에서 혼자 많은 생각을 하며 다짐을 했습니다. 나를 스카우트해주지 않은 서울에 있는 대학교와의 경기에서는 무조건 이기자는 목표를 세웠습니다.(당시 대광고는 봉황대기 준우승을 차지하는 등 팀성적이 좋았지만 서울 소재 야구부가 있던 대학들 중에 김재박을 찾는 곳은 없었다)
영남대 입학 후 여기서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는 각오로 헬스장을 찾아가서 웨이트를 시작하는 등 먼저 체력단련에 힘을 썼습니다. 당시에는 야구 선수에게는 웨이트를 하면 안좋다며 못하게 하던 때여서 몰래 헬스장을 찾아가 운동을 했습니다.
또 동계에는 숙소 앞산에 올라 달리기(일종의 크로스 컨트리)를 하는 등 그렇게 1년 6개월여 동안 운동을 열심히 하다보니 체중은 6kg이상 빠졌지만 근력이 붙으면서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타격 훈련때 전에는 잘 맞아야 외야수 앞에 간신히 떨어지던 타구가 외야수 키를 넘어가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간간히 홈런이 되기도 했죠. 내야 수비도 강해진 어깨로 송구가 빨라지면서 원래 포지션이었던 2루수에서 유격수로 옮기게 됐습니다.
=유격수가 아니라 원래 2루수였다고요.
▲야구를 본격 시작한 대구국민학교 5학년 때는 포수였습니다. 대구에서 곧잘한다는 평을 들으며 경북중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는 5남매 중 막내였던 제가 형들도 못간 명문 경북중학교에 유일하게 입학해서 어깨가 으쓱했죠.
하지만 들어가자마자 힘도 없고 체구도 작은 탓에 2루 송구도 제대로 못하면서 감독님이 2루수로 방향을 바꿔줬습니다. 포수가 2루 송구를 하는데 직선이 아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니 내가 봐도 한심한 지경이였죠. 그래서 중학교 때부터 대학교 1학년 때까지 내 포지션은 2루수 였습니다.
중학교 내내 작은 키로 야구를 하다보니 경북고로 진학을 못하고 서울 신생팀 대광고에 오게 됐죠. 때마침 중2 때 부모님과 온 가족이 서울로 이사를 와서 대구상고 등에서 받아준다는 것을 마다하고 대광고로 왔습니다. 대구에 그대로 남았다면 내 야구 인생이 어찌됐을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그런 선수가 훗날 어떻게 공수주 3박자를 갖춘 국가대표가 되고 최고의 스타 플레이어로 성장했나요.
▲신생팀 영남대 야구부 창단 멤버로 가고 얼마전 작고하신 배성서 감독님이 부임한 후 강훈련을 받으면서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또 앞에 말했듯이 혼자 개인훈련을 빠짐없이 한 덕분에 힘과 자신감이 붙었죠. 타격과 수비 모두 잘돼고 형편없던 달리기 실력도 좋아져 팀에서 내가 제일 빠른 선수가 됐습니다.
그리고 2학년 때 대학야구 추계리그때 리딩히터로 타격상을 수상하면서 내 이름을 드디어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일본과 대만에 대학대표로 출전해서 좋은 성적을 냈고 1975년 아시아선수권과 1976년,1977년 세계대회에 국가대표로 출전하는 기쁨을 맛보게 됐습니다. 이때부터 내 야구인생의 탄탄대로가 펼쳐진 셈입니다.

대학 1학년 때까지만 해도 언감생심이던 국가대표가 됐으니 정말 감개무량이었죠. 게다가 1977년 니카라과에서 열린 세계대회에서 우승까지 차지하면서 야구 인생이 잘 풀리게 됐습니다. 그 해 실업야구 7관왕도 차지했고, 1982년 세계선수권서 ‘개구리 번트’와 함께 우승하고 프로야구 최고 연봉 선수(2400만원)가 되는 영광을 안게 됐죠.
=한국야구 ‘대표 유격수’로 성장할 수 있도록 가장 도움을 준 분들이라면.
▲아무래도 어린시절이던 중고등학교와 대학교 은사님들이 가장 도움을 많이 주신 분들이죠. 박창용 경북중 감독님은 저를 내야수로 성장할 수 있도록 기본기를 확실하게 다지게 해주신 분입니다. 포구 요령 등 수비 기본기를 잘 가르쳐주시고 훈련을 열심히 해서 착실하게 다진 덕분에 유격수 등 여러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바탕이 됐죠.
또 해병대 출신이었던 선우종 대광고 감독님은 강한 정신력을 가지도록 가르쳐주신 분입니다. 정신적으로 많이 성숙해지게 했죠. 비록 난 그 당시에는 야구를 잘 못하는 평범한 선수였지만 그 분들의 가르침 덕분에 나중에 스타로 탄생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영남대 배성서 감독님은 내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분이죠. 단체훈련과 개인훈련으로 공수주를 갖추게 되면서 유격수로 완전히 정착하게 해주셨고 여러 포지션을 경험하게 해주셨습니다. 3,4학년 때는 강한 어깨로 유격수에서 경기 후반 마무리 투수로 등판할 기회도 제공해주셨죠. 안정된 제구력에 슬라이더가 주무기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슬라이더는 일품이었죠. 나중에 프로에서 정삼흠 등 후배 투수들에게 슬라이더를 전수해줘 그들이 프로 생활을 하는데 도움이 톡톡히 됐죠.
=학생시절 은사들 덕분에 여러 포지션을 경험하셨는데 아쉬운 점은 없나요.
▲한 경기서 내외야, 투포수 등 전포지션을 다 뛰어보고 은퇴를 못한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미국에서는 이벤트로 그런 경기도 했다고 하는데 저도 그걸 해보지 못한 것이....사실 시즌 말미 순위가 다 정해진 뒤에는 승패를 떠난 경기도 있어서 구단에서 배려만 해준다면 그런 경기를 해 볼 수도 있는데 기회가 안왔죠. 현역시절 전포지션을 다 경험해본 선수는 제가 유일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선수시절 가장 닮고 싶었던 선배는 누구였나요.
▲당시에는 요즘처럼 미디어가 발전한 시기가 아니었기에 외국 선수들은 보지도 못했고 국내 선수들 중에서는 하일 선배님이 최고였기에 그 분을 닮고 싶어했죠. 하일 선배님은 국가대표 유격수로서 예쁘게 야구를 잘하셨습니다.(많은 전문가들이 한국야구 최고 유격수 계보로 하일-김재박-류중일-박진만 순서로 꼽는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
/박선양 기자 sun@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