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이면 한국야구박물관(명예의 전당)이 탄생할 전망이다. 그동안 말이 많았던 야구박물관이 부산 기장군에 올 여름 착공 예정으로 2026년 개관할 예정이다. 박물관에 들어갈 소장품은 그동안 수집이 많이 돼있는 상태이고 그곳에 한 자리를 차지할 명예의 전당도 이제부터 준비해야 한다. 오센(OSEN)은 특별기획으로 명예의 전당(Hall Of Fame) 주인공이 될 레전드 스타들을 찾아 인터뷰한다. 또한 한국야구 미래를 책임질 기대주(Hope)를 찾아갈 예정으로 가칭‘KBO 호프를 찾아서’시리즈를 연재한다. [편집자주]
‘오리궁뎅이 타법’으로 한시대를 풍미했던 김성한(67) 전 감독은 ‘원조’ 이도류(투타겸업) 선수로서 뛰어난 성과를 거뒀습니다. 또한 국가대표 코치, 타격코치, 감독 등 지도자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 야구 발전에 기여를 해왔습니다. 그의 야구 인생은 많은 이들에게 영감과 교훈을 주는 이야기로 남아 있습니다. 광주 KIA 챔피언스필드에서 그를 만나 인터뷰했습니다.(상편)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광주지역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유소년 야구 발전을 위해 광주야구소프트볼협회 회장을 맡고 있고 지역방송국에서 아침방송 패널 및 맛기행 프로그램, 프로야구 해설 위원 등으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못지않게 건강해보이십니다. 요즘도 싱글골퍼로 운동하시나요.
▲골프보다는 파크골프를 매일 하고 있습니다. 광주시파크골프협회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거의 매일 파크골프를 치며 1만5000보 이상을 걷고 있습니다. 주로 오전에 운동하지만 스케줄 등으로 못할 때는 오후에라도 꼭 치고 있습니다. 한동안 살이 너무 쪄서 고민이었는데 파크골프 1년하면서 몸무게가 10kg이나 줄었습니다. 주위에서는 벌써 파크골프냐고 하지만 나한테는 딱맞는 운동입니다. 등산도 해보고 자전거도 해보고 골프도 해봤지만 파크골프가 몸에 무리도 안가면서 가장 좋은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전 어린시절부터 바로 질문드리겠습니다. 감독님은 군산상고 시절부터 전국대회 우승에 기여하는 등 '이도류'로 일찌감치 전국구 스타로 유명했습니다. 야구는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동네에서 친구들과 테니스공을 가지고 찜뽕을 하고 있었는데 지나가던 야구부 감독께서 눈여겨보시고 야구를 권유해 시작하게 됐습니다. 소질이 있었는지 4학년 때 시작하자마자 5, 6학년 형들과 함께 주전으로 뛰었죠. 그 때부터 대학 2학년 때까지는 타자보다는 투수였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를 거쳐서 동국대 3학년 때 팔꿈치 통증 부상으로 투수를 그만둘 때까지는 투수가 주 포지션이었습니다. 부상으로 투수를 그만둔 뒤 당시 배성서 동국대 감독님과 함께 일명 '오리궁뎅이 타법'을 연구끝에 시작하게 됐습니다. 테이크백없이 하체를 이용하는 타법으로 배감독님과 함께 연구하고 훈련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배성서 감독님은 열정이 대단한 분이었죠.

<사진>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마운드에 있던 투수 김성한 /출처=KBO
=그런데 프로데뷔해서 다시 투타를 겸업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해태 창단멤버로 프로를 시작했는데 선수가 15명으로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투수는 김용남, 신태중 등 5명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김동엽 감독님께서 너도 투수를 하라고 지시해서 다시 마운드에 오르게됐습니다. 그 때는 지금처럼 내가 하고 싶은 포지션을 지도자들에게 밝히지 못하는 분위기여서 감독님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죠. 그래도 내생각에는 투수로는 오래할 것 같지 않아 혼자서 3루 내야수 훈련을 하며 타격 연습도 했죠. 주변에서는 곱지 않은 눈치였지만 내가 살길을 찾는 수밖에 없어서 그렇게 했죠. 결국 1982년 프로야구 개막시즌이 되면서 주전 3루수로 뛰면서 투수로 필요하게 되면 마운드에 올랐습니다. 그렇게 해서 전반기 40경기에서 선발 4승에 구원 6승을 거두며 10승을 달성하고 후반기에는 타자에 전념했습니다.
그렇게 첫 해를 보낸 뒤 1983년에 또 한 번 투수로 등판하게 됩니다. 당시 1위를 달리던 삼미 슈퍼스타즈와의 광주 3연전 마지막날 선발 투수가 펑크가 나면서 김응룡 감독님이 선발투수로 등판을 시켰습니다. 어떻게든 5회만 버티자며 올라갔는데 웬걸 완봉승을 거두는 깜짝 활약을 했죠. 덕분에 삼미는 그 이후 1위에서 떨어지고 저희 해태팀이 전반기 우승을 차지하게 됐습니다. 그 해 해태가 한국시리즈 첫 우승까지 거머쥐는데 도화선이 된 등판이었습니다.

<사진>2022년 한국프로야구 레전드 40인에 선정된 김성한 /출처=KBO
=투수와 타자 모두 겸업하던 '이도류'였는데 어느 쪽이 더 하고 싶었나요.
▲앞서 말했듯이 투수로서는 팔꿈치 부상 등으로 오래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타자로 성공하기 위해 훈련을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그래도 이도류로 뛸 때 재미도 많았습니다. 경기적인 것은 물론 투수로 등판해 승리투수가 되거나 삼진을 잡으며 기록을 세우면 수당이 주어졌죠. 타자로서도 홈런, 타점 등으로 수당을 챙길 수 있었으니 경제적으로도 쏠쏠했죠. 해태가 나중에는 어려워졌지만 내가 이도류로 뛸 때만 해도 라이벌 롯데 등과 경기에는 수당을 더 세게 거는 등 지원이 괜찮았습니다. 그리고 내 이후에는 '이도류'가 국내에서는 없다가 최근 오타니(LA 다저스)가 나오면서 다시 부각되니 자부심도 생깁니다.
='오리 궁데이 타법'은 타자로 살아남기 위해 독특한 자세가 됐는데 골프칠 때도 비슷한 자세인가요.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주위에서는 비슷하다고들 합니다. 나름 나한테 가장 적합한 자세여서 선수시절부터 트레이드 마크가 된 것 같습니다.
=해태 타이거즈 창단 멤버로 시작해 후신 KIA 타이거즈까지 '원클럽맨'이었습니다. 막강했던 해태 타이거즈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요.
▲유일한 타이거즈 '원클럽맨'이라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해태 타이거즈가 막강했던 원동력이라면 자존심과 자부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구단 지원은 삼성 등 타구단에 못미쳤지만 한국시리즈 챔피언이라는 자존심과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뉴욕 양키스, 일본의 요미우리 자이언츠처럼 한국에는 해태 타이거즈라는 명문팀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타팀은 포스트시즌에 가면 '원팀이 되자'며 파이팅을 외쳤지만 우리 해태는 각자가 '내몫'만 해내자는 마음가짐이었습니다. 모두가 그런 마음으로 경기에 임한 것이 승리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내몫만 하자는 것은 실수하지 말자는 의미이죠.
아마 자율훈련은 당시 김응룡 감독님이 가장 먼저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비시즌 미국 하와이 전지훈련 때에는 3일 훈련에 1일 휴식 일정으로 팀훈련을 짧게 집중적으로 한 뒤에는 각자 알아서 하는 개인훈련이었습니다. 팀훈련만 하고 개인훈련을 소홀히 해서 다음 시즌 제대로 자세가 안나오면 당연히 경기에 뛰지 못하니 선수들 각자가 팀훈련 뒤에는 개인훈련을 할 수밖에 없었죠.

<사진>전성기 시절의 김성한 /출처=KBO
=7번의 해태 우승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우승이라면.
▲1983년 첫 우승이죠. 내가 이도류로 마지막 활약을 한 것이 기폭제가 되는 등 정상에 올랐을 때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짜릿했습니다. 모든 것이 첫 경기, 첫 우승, 첫 경험이 의미가 있듯이 제게는 첫 우승할 때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그럼 선수로서 개인적으로 뿌듯했던 순간이라면.
▲1988년 최초로 30홈런 고지에 오르며 홈런왕에 올랐을 때입니다. 당시 108경기에서 30홈런을 치는 것은 최대치였다고 생각합니다. 3번의 홈런왕 중에서 가장 뿌듯했죠. 그 때는 만30세의 나이로 근력, 체력, 기술적으로 모두가 최고일 때였습니다.

<사진>2006년 올스타전에 앞서 열린 이벤트 경기에서 오랜만에 '오리궁뎅이 타법'을 선보이고 있는 김성한 전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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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양 기자 sun@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