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우리 팀 마무리다, 최고 마무리인데…”
프로야구 한화 이글스 마무리투수 김서현(21)은 지난 5일 대전 KT전에서 2-1로 앞선 8회 2사 1,3루 위기에 구원 등판했지만 몸에 맞는 볼과 희생플라이로 동점을 허용했다. 이어 또 몸에 맞는 볼로 제구가 흔들리며 2사 만루 위기를 자초했고, 강백호에게 우측 몬스터월을 직격하는 3타점 싹쓸이 결승타를 맞고 무너졌다.
이닝을 끝내지 못한 채 마운드를 내려간 김서현과 함께 포수 최재훈(36)도 같이 교체됐다. 승부가 넘어가자 주전 포수 최재훈도 체력 관리 차원에서 빠졌고, 덕아웃 안에 들어와 김서현을 붙잡고 무언가 말하는 모습이 TV 중계 화면에 포착됐다. 김서현이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모습만 봐선 크게 혼나는 것 같았다.
일각에선 최재훈이 지나치게 화를 내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나왔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6일 KT전 승리 후 만난 최재훈은 “그거 갖고 팬분들께 욕을 많이 먹었다”며 “(김)서현이한테 ‘넌 우리 팀 마무리다. 최고 마무리인데 자신감이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네 볼은 못 치니까 한가운데로 자신 있게 던져라’고 좋은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서현이가 울더라. 거기서부터 팬분들이 오해를 하신 것 같더라”고 덕아웃에서 비쳐진 장면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이어 최재훈은 “서현이한테 화를 낸 게 아니다. (세는 나이로) 22살 마무리가 그렇게 세이브를 많이 했다는 건 정말 잘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현이한테 그런 칭찬을 하면서 ‘이런 눈물과 표정은 내일 드러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신 있게 마운드에서 네 공을 던져라’는 말을 하고서 마지막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그건 못 보신 것 같다”며 웃었다. TV 중계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팬들이 찍은 ‘직캠’을 통해 최재훈이 김서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격려하는 모습도 영상으로 생생하게 찍혔다.

그러나 김서현은 6일 KT전에서도 난조를 보였다. 5-1로 앞선 8회 2사 1,2루 세이브 상황에 나선 김서현은 장진혁을 헛스윙 삼진 잡고 9회로 넘어갔지만 제구가 또 흔들렸다. 권동진과 허경민에게 볼넷을 주며 주자를 쌓았다. 1사 1,2루에서 안현민에게 1타점 중전 적시타를 맞은 뒤 폭투가 나오며 주자를 한 베이스씩 공짜로 내줬다. 1사 2,3루에서 강백호에게 2타점 중전 적시타 맞아 5-4, 1점차 턱밑 추격을 당했다. 결국 김서현은 2경기 연속 이닝을 마무리하지 못한 채 강판됐다. ⅔이닝 2피안타 2볼넷 2탈삼진 3실점.
2경기 연속 실점은 이전에 한 번 있었지만 2경기 연속 이닝 중 강판은 올 시즌 김서현에게 처음이었다. 하지만 시즌 전체로 보면 49경기(47⅓이닝) 1승1패24세이브2홀드 평균자책점 2.47 탈삼진 58개로 여전히 뛰어난 성적이다. 만 21세 젊은 마무리에겐 이 같은 좌절도 성장의 자양분이 될 수 있다. 실패가 보약이라는 말도 있다.
최재훈의 생각도 같았다. 그는 “마무리투수니까 이런 경험도 많이 해봐야 한다. 그래야 더 큰 선수가 될 수 있다. 다음에는 잘 던질 것이다”며 “오늘 체인지업도 나쁘지 않았다. 제구가 들쑥날쑥하지만 그거만 고치면 최고의 마무리다. 아직 어리고, 성장할 나이이기 때문에 크게 보면 최고의 투수가 될 것이다”고 확신했다. 끝에 제구가 흔들리긴 했지만 체인지업을 던져 좌타자 장진혁과 앤드류 스티븐슨에게 헛스윙 삼진을 잡아낼 만큼 새로운 무기의 가능성도 봤다.

무엇보다 한화가 이날 경기를 역전당하지 않고 5-4로 이긴 게 의미 있다. 김서현의 심리적 충격도 팀 승리로 줄여질 수 있다. 그 중심에도 최재훈이 있었다. 다음 투수 한승혁이 김상수에게 중전 안타를 맞아 1사 1,3루로 동점에 역전 주자까지 나간 상황에서 최재훈이 상대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KT 최성민이 초구에 번트 동작을 취했는데 스퀴즈 낌새를 알아차린 최재훈이 바깥쪽으로 빠자앉았다. 최성민이 번트 헛스윙한 사이 최재훈이 공을 받고 빠르게 3루로 던졌다. 숏바운드로 들어간 것을 3루수 노시환이 잘 잡아 빠르게 태그하면서 역동작에 걸린 3루 주자 강백호를 견제사로 죽였다. 큰 고비를 넘기며 이어진 2사 1루에서 한승혁은 최성민을 유격수 내야 뜬공 처리하며 5-4, 1점차 승리로 경기를 끝냈다. 한승혁이 시즌 3세이브째를 올렸지만 실질적 세이브는 최재훈의 레이저빔 견제사였다. 김서현도 세이브는 아니었지만 홀드 기록을 챙겼다.
이에 대해 최재훈은 “번트 사인이 나올 것 같아 (노)시환이랑 눈을 마주쳐서 3루로 던지겠다고 약속했다. 그 타이밍에 공을 빼서 바로 던졌는데 운 좋게도 잡혀 너무 좋았다”며 기뻐했다. 경기의 흐름을 읽고 상대 작전을 대비한 노련함이 빛난 플레이. 김경문 한화 감독도 “중요한 순간 좋은 수비가 있었다”고 칭찬했다.

한화로선 정말 중요한 승리였다. 자칫 이날도 역전패했다면 연이틀 필승조 한승혁과 김서현을 내고 지는 경기가 돼 충격이 오래 갔을 것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견제사로 큰 고비를 넘겼고, 하루만에 LG에 빼앗긴 1위를 탈환했다. 그럼에도 최재훈은 1위를 지키는 게 아니라 도전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솔직히 말해 그동안 밑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도전자 입장이라 생각한다. 당장 1~2위를 하겠다가 아니라 1승, 1승 하다 보면 위로 올라가지 않을까 싶다”며 도전자의 자세를 강조했다.
이날 승리는 5이닝 9탈삼진 1실점으로 막은 ‘에이스’ 코디 폰세의 개막 후 최다 선발 14연승 기록이라는 점도 의미가 있었다. 2003년 현대 정민태, 2017년 KIA 헥터 노에시의 KBO리그 최다 기록과 타이를 이뤘다. 폰세는 “기쁘고 영광스럽다. 동료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기록이다. 등판 때마다 호흡을 맞추는 최재훈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날씨 때문에 조금 어려움이 있었지만 최재훈의 리드 덕에 헤쳐나갈 수 있었다”며 고마워했다.
최재훈은 “폰세는 최고의 투수다. 마운드에 올라가면 자신감으로 던진다. 그 기세가 안 밀리고, (상대를) 눌러버리기 때문에 좋은 결과가 나온다”며 “폰세에게 13~14연승 기록을 생각하지 말고 공격적으로 싸우자고 했다. 잘 던지면 좋은 거고, 못 던지면 뒤에 투수들 믿고 하자고 말했다. 폰세도 마찬가지 생각으로 타자와 싸운다는 생각으로 했고, 그런 부분에서 호흡이 잘 맞는다”고 말했다. /waw@osen.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