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팬들에게 더 사랑받는 장벽 있는 거장 박찬욱 감독이 무려 20년을 준비한 작품이자 가장 대중적인 영화를 내놨다. 웃기지만 울고 싶은 블랙코미디 앞에 도저히 '어쩔수가없다'.
영화 '어쩔수가없다'(감독 박찬욱, 제공/배급 CJ ENM, 제작 모호필름/CJ ENM 스튜디오스)는 "다 이루었다"고 느낄 만큼 삶이 만족스러웠던 회사원 만수(이병헌)가 덜컥 해고된 후, 아내와 두 자식을 지키기 위해, 어렵게 장만한 집을 지켜내기 위해, 재취업을 향한 자신만의 전쟁을 준비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는다. 박찬욱 감독이 1997년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로부터 올해의 책으로도 선정됐던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액스(The Ax, 도끼)'를 원작 삼아 28년 만에 영화로 각색한 작품이다.
'공동경비구역 JSA', '올드보이', '박쥐', '친절한 금자씨', '아가씨', '헤어질 결심' 등 작품마다 호평받은 그 박찬욱 감독의 신작이다. 앞서 그는 '배운 변태', '우아한 미장센' 등 영화 팬들에게 유독 사랑받는 독창적인 영화 세계를 보여온 바. 박찬욱은 '어쩔수가없다'에서도 장면의 구석구석을 뜯어보는 미학의 재미를 보여준다. 어느 한 컷 귀퉁이까지 이유 있는 색감, 무늬, 소품 등으로 꽉 차있는 풍경은 단 2시간 안팎에도 각 캐릭터들의 절박함에 몰입하게 한다. 빈 틈 없는 컷 안에서 펼쳐지는 살색과 유혈은 고어하지 않고 고매한 스릴감을 선사하기도 한다.

장면의 아름다움이 익히 알려졌다면 소재와 이야기의 장벽은 박찬욱 감독 작품들의 허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쩔수가없다'는 그 벽을 허물었다. 당장 실직과 재취업이라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피고용인 집단의 유대감을 자극한다. 평생을 바친 회사에서 다 이루고 살았던 안정감을 해고로 잃어버린 가장의 고군분투기. 국경, 직종, 성별, 나이를 초월해 누구라도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즉각적인 공감을 유도하는 것.
여기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블랙코미디 요소들이 곳곳에 상당 시간 포진해 있다. 웃음만큼 쉽게 전염되는 행동이 또 있을까. 블랙코미디 형식으로 속도감 있게 풀어내며 친근하게 다가온다. 물론 깔깔 거리며 웃다가도 정신 차린 뒤엔 재취업이라는 절박한 상황의 애잔함도 있다. 해고 노동자는 재취업을 위해 무슨 짓까지 할 수 있는가. 과연 생존이 절박할 경우 도덕은 끝까지 지켜질 수 있는지. 부도덕마저도 단호하게 해내기 어려운 소시민들의 삶은 어떤 투쟁의 결과인지를 가볍지만 묵직하게 생각해 보게 한다.
이 모든 공감의 중심에는 단언컨대, 이병헌이 있다. 손예진, 박희순, 이성민, 염혜란, 차승원 등 화려한 캐스팅으로 소문난 '어쩔수가없다'이지만 분량의 상당수는 이병헌이 독차지했다. 그럼에도 몰아주기를 납득하게 만드는 건 단지 이야기의 구조 뿐만 아니라, 모든 분량을 적절하게 소화해낸 연기 베테랑 이병헌 덕분이다. 새로운 얼굴을 봤다고 할 수는 없겠다. 다만, 할 수 있는 모든 디테일을 동원해 표현에 섬세함을 담았다. 이마 힘줄 하나까지도.

그렇다고 이름난 배우들의 존재감이 희석되진 않는다. 당장 손예진은 7년 만의 영화에서 한 가정의 아내, 평범한 엄마로 전에 없던 모습을 보여준다. 적은 분량에도 여전한 미모는 덤이다. 박희순과 이성민, 염혜란의 허슬 플레이도 흘려보낼 수 없다. 말 그대로 몸을 아끼지 않는 투혼은 이들을 만수와 함께 있는 매순간 각각 에피소드의 주인공으로 만들어버린다.
넘치는 기대감에 부응한 결과 '어쩔수가없다'는 최근 진행된 제82회 베니스영화제 경쟁 부문에 공식으로 초청됐고, 제50회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는 신설된 국제관객상의 첫 수상작이 됐다. 여기에 미국 아카데미 시상작 국제장편 부문의 한국 대표작으로 선정되기도 한 바. 국내에서는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첫 공개됐다. 정식 개봉까지 입소문이 퍼지는 일도 어쩔 수가 없겠다.
24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1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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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CJ ENM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