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선택이 만들어가는 운명의 길
OSEN 강희수 기자
발행 2025.10.02 13: 04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운명에 대한 본능적인 호기심과 불안을 품고 있습니다. 명리학을 연구한다고 하면 으레 "제 사주 좀 봐주세요. 제 사주 어때요?"라는 질문을 받곤 합니다. 이 질문에는 기대와 불안이 동시에 서려 있지만, 사실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길고 복잡한 분석이 아닙니다. 단지 마음 깊은 곳에서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안도감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인간적인 갈망일 뿐입니다.
하지만 삶은 결코 '좋다/나쁘다'로 나눌 수 있는 이분법적 도식이 아닙니다. 사주를 단순히 좋고 나쁨으로 단정하는 태도는 명리학의 본래 취지를 놓친 것입니다. 이는 마치 의사가 환자에게 "건강하다/병들었다"라는 말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진정한 진단은 그 너머에 있습니다.
저는 비싼 상담료를 고집하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저렴한 상담가이기도 합니다. 그 기준은 돈이 아니라 절실함입니다. 삶의 한복판에서 절체절명의 어려움에 처해 명리의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제 모든 역량을 쏟아붓습니다. 상담료는 철저히 경제적 여력에 맞춥니다. 가진 것이 없는 이에게는 무료로, 여유 있는 이에게는 더 많이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은 물질에 비례하기 때문입니다. 싸구려로 받은 조언은 쉽게 흘려보내기 쉽지만, 어렵게 지불한 상담료는 곱씹고, 붙들고, 실천하려 애씁니다. 절집에서의 시주나 성당에서의 헌금이 신심(信心)의 표현이듯, 상담료는 단순히 서비스의 대가가 아니라 성의와 절실함의 교환입니다. 저는 이를 대가 없는 시혜가 아닌, 간절함이 맺는 결실로 봅니다.
전후 맥락 없이 던지는 "제 사주 좋아요?"라는 질문은 언제나 난감합니다. 질문의 본질이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문제를 풀고자 하는지, 삶의 어느 지점에서 방향을 구하고자 하는지 말하지 않고 단지 '좋으냐 나쁘냐'만을 묻습니다.
이러한 습관은 16세기 명나라 시대의 명리학 고전인 『삼명통회(三命通會)』로 거슬러 올라가는 문화적 잔재입니다. 이 책은 '재관(財官)'—재물과 관직—을 중심으로 가치 체계를 굳혀, 사주를 부귀영화를 점치는 인식을 고착화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다양성과 개성의 시대입니다. 돈과 권력이 전부인 시대는 아닙니다. 현대 사회에서 '좋은 사주'란 반드시 부귀를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타고난 성향과 조화를 이루며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사주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한 개인이 타고난 특성과 기질을 보여주는 별빛 같은 지도입니다. 각 사람은 저마다 다른 기운을 품고 태어납니다. 누군가는 개나리처럼 이른 봄에 피어나는 기운을, 또 누군가는 장미처럼 여름 햇살 아래 화려하게 만발하는 기운을 타고납니다.
문제는, 개나리 사주를 타고난 사람이 혹독한 겨울 한복판에서 억지로 꽃을 피우려 애쓰는 것입니다. 결과는 얼어붙어 시들 뿐입니다. 이것은 개나리 운명이 나쁜 것이 아니라, 시기와 선택이 잘못된 것입니다. 반대로 개나리 사주가 겨울을 참고 내실을 다진다면, 봄이 오자 온 산을 붉게 물들이며 세상의 찬사를 받습니다.
사람의 운명도 이와 같습니다. 장미가 개나리가 될 수 없고, 개나리가 장미가 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각자에게는 자신만의 빛을 발할 수 있는 계절과 자리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명리이고, 그것에 맞추어 방향을 정하는 것이 선택입니다.
따라서 사주를 본다는 것은 길흉을 맞추는 예언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내 본질을 이해하고, 그 본질에 맞는 목표와 시기를 정하는 것입니다. 운명을 바꾸는 힘은 하늘에 있지 않고, 바로 자기 선택 속에 있습니다.
세상에는 본질적으로 나쁜 사주란 없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선택은 나쁜 운명을 만듭니다. 물은 본래 투명하지만, 그릇이 탁하면 탁하게 보입니다. 사주는 물과 같고, 선택은 그릇과 같습니다. 물이 탓할 일이 아니라 그릇을 바꿔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실패를 사주 탓으로 돌리며 "내 팔자가 그래서 그래요"라고 자조합니다. 그러나 팔자가 아니라 자신에게 맞지 않는 길을 억지로 가려 했던 선택을 돌아봐야 합니다.
사주는 가능성의 지도일 뿐, 운명을 대신 살아주지 않습니다. 길 위에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은 언제나 자기 자신입니다.
운명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사주는 주어진 조건이고, 선택은 그 조건 위에 집을 세우는 방식입니다. 같은 나무로도 튼튼한 기둥을 세울 수도 있고, 바다를 향하는 배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나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그 나무를 어떻게 다듬고 쓰느냐의 문제입니다.
세상엔 나쁜 사주란 없습니다. 다만 나쁜 선택이 있을 뿐입니다. /남다른(남다른 운명공작소장)
※ 외부 필진의 기고는 OSEN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Copyright ⓒ OSEN.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