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①] 평점 9점 '세계의 주인' 윤가은 감독 "관객=영화의 시작"에 이어) "오늘 영화제야?". 김초희, 윤단비, 이옥섭, 임선애. 현재 한국 영화계 주목할 만한 여성 감독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오직 윤가은 감독의 새 영화 '세계의 주인'을 위해서. 어떤 영화제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에는 그만한 이유와 가치가 있었다. 불황론만 일던 한국영화계에 '세계의 주인'이 불씨를 던졌다.
지난 24일 오후, 서울시 강남구 압구정동에 위치한 CGV압구정점에서 역대급 GV가 진행됐다. 영화 '세계의 주인'(감독 윤가은) 상영 후 마련된 이 자리에는 작품을 연출한 윤가은 감독이 모더레이터로 나선 가운데 김초희 감독, 윤단비 감독, 이옥섭 감독, 임선애 감독이 참석해 관객들과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저의 성덕잔치 같은 자리"라는 윤가은 감독의 첫 소개가 어울릴 만큼 이날의 라인업은 관객들을 설레게 했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 '남매의 여름밤', '메기', '세기말의 사랑' 등 김초희, 윤단비, 이옥섭, 임선애 네 감독은 현재까지의 대표작들 만으로도 웬만한 영화제를 방불케 하는 라인업임에 분명했다. 더욱이 윤가은 감독은 "이 분들이 제가 '세계의 주인'을 만드는 동안 옆에서 가장 힘이 돼준 분들"이라며 의미를 더했다.

앞서, 지난 22일 개봉한 '세계의 주인'은 '인싸'와 '관종' 사이, 속을 알 수 없는 열여덟 여고생 주인(서수빈 분)이 전교생이 참여한 서명운동을 홀로 거부한 뒤 의문의 쪽지를 받기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윤가은 감독이 지난 2019년 호평받은 '우리집' 이후 6년 만에 선보인 신작으로 관객 평점 9점대를 기록하며 경이로운 호평을 받고 있다.
이에 김초희 감독은 "한 명이라도 많은 분들이 이 영화를 봤으면 하는 마음에 오게 됐다"라고 작품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밝혔다. 이옥섭 감독은 "시사회 때 보고나서 몸이 아프다는 분들이 많았다. 몸으로 보게 되는 영화다. 그런데도 말을 아끼게 된다. 단지 '최고다', '좋다'는 말로는 표현이 안 될 것 같아서 직접 표현하고 싶어진다"라고도 밝혔다.

그만큼 이들은 작품의 시작 단계부터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모두가 반대에 가까운 우려를 보낼 때도 마찬가지였다고 윤가은 감독은 "제가 '과거에 어떤 일을 겪은 소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시작할 즈음에 '시장에 내놔도 괜찮겠냐'는 지적이 처음이었다. '소재부터 힘들다'고. 그런데 여기 계신 분들은 다들 그냥 들어주셨다. 다들 이야기 자체를 궁금해 하셨지, 한 분도 가르치려고 하거나 '그 이야기 괜찮겠어?'라고 하지 않으셨다. 그냥 궁금하다고"라며 회상했다.
이에 임선애 감독은 "창작자로서는 이야기의 희소성 때문에라도, 남이 하지 않은 걸 더 하고 싶어진다. 그런데다 윤가은 감독은 어떤 이야기도 불편하지 않게 이야기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주는 사람이다. 그 믿음 때문에 어서 빨리 이야기를 만들었으면 하는 마음이 제일 컸다"라고 강한 신뢰를 보냈다. 윤단비 감독 역시 "가은 감독님 자체가 '자기검열'이 엄청 심한 사람"이라며 "그래서 어떤 창작을 하더라도 그게 보여서, 구태여 내가 검열할 거리를 하나 던져주지 않더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라고 말했다.
김초희 감독은 이어 "어떤 사건을 다룰 때, 생존자들에게 조금이라도 상처가 된다면 그 부담 때문에 (영화를) 만들기 힘들다. 그런데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어떤 동력이 있어서 뭔가가 나오는 거다. 어떤 불확실함을 견뎌야만 끝까지 만들 수 있다. 그 불확실함을 갖고도 자기를 검증하겠다고 스스로를 던지는 거다. 그래서 관객이 굉장히 무서운 존재인데, 이 분이 해냈다"라며 윤가은 감독을 극찬했다.
정작 "(관객 반응이) 너무 무섭다"라며 웃은 윤가은 감독은 "이야기가 너무 어려웠다"라고 수긍하면서도 "그런데 하고 싶고, 해야할 것 같았다. 제일 어려운 건 저를 들여다 보고, 현실을 같이 보는 거였다. 이것만 어려우면 좋겠는데 자기검열이 저를 미치게 만들더라"라고 털어놨다. 더불어 "사건의 생존자들을 볼 때 영화 속 수호(김정식 분)처럼 어른들의 말을 빌려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갖고 있다'고 보는 경향, 아니면 '완전무결하다'는 존재로 보는 경향, 두 가지 틀에만 갇힌 게 저한테는 또 다른 폭력처럼 다가와 상처를 줬다. 생존자는 아무렇지 않으면 안 되나"라고 해 듣는 이들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실제 '세계의 주인'에서 주인공 주인은 결코 완벽하지 않다. 으레 사춘기 청소년들처럼 가족에게 상처주는 말을 내뱉는가 하면, 친구와 싸우기도 한다. 자신이 만든 캐릭터가 보는 이들의 이해를 받고 사랑받길 바라는 감독으로서는 어려울 정도의 솔직한 표현이다. 이에 윤단비 감독이 "어떻게 밀고 나갔냐"라고 묻자, 윤가은 감독은 "(인물이) 진짜 살아있는 사람이어야 하고 제가 그런 사람이라 그런 것 같다"라고 답했다.
특히 윤가은 감독은 "저희 서수빈 배우도 같이 그 고민을 했다. 너무 잘했다고 무술감독님도 말해주셨는데도, 폭력적으로 보이는 게 아니냐고 하더라. 저 역시 걱정도 됐지만 반드시 그 장면은 들어가야 했다. 생존자들은 완전 무결한 사람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기가 힘들다. 그런데 누구나 잘할 때도 실수할 때도 '나'다. 어떤 사람들에겐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렇지 않다고 알려주고 싶었다"라고 설명했다.
이 밖에도 감독들은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한 추천사를 궁금해하는 관객들의 질문에 솔직한 의견도 나눴다. 김초희 감독은 "보통 가까운 분들께 추천할 테니 '안 보면 죽어, 네 손해야'라고 한다. 시간이 나빠도 보라고. 돈 많은 사람들한테는 표 좀 많이 끊으라고 했다"라며 특유의 유머감각을 잃지 않고 너스레를 떨었다. 임선애 감독은 "일단 극장에 가라고 한다. 제 단골 미용실 사장님이 영화가 개봉하면 그냥 다 보는 분인데도 '세계의 주인'을 모르셔서 충격받았다. 이건 극장에 가야 훨씬 좋다"라고 말해 영화산업의 위기를 상기시키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이옥섭 감독은 연인인 배우 구교환을 언급하며 "구교환 선배가 많이 쓰는 방법인데 영화 보고 안 좋으면 다시 표(값)를 주겠다고 한다. '세계의 주인'은 그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자신했다. 윤단비 감독은 "주변에서 사실 이미 많이 봤더라. 보고 평을 많이 나눴는데 영화를 보고 이야기 나눈 작품이 오랜만이다. 영화가 좋으니 이렇게까지 많은 담론이 나오는 게 너무 좋더라. 시사회 끝나고 개운한 작품 너무 오랜만이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GV 말미에 임선애 감독은 "시사회를 보고 뒤로 여운이 오더라"라며 울컥한 뒤 "초희 감독님도 전화 와서 엉엉 울더라"라고 폭로해 '웃픈(웃긴데 슬픈)' 폭소를 자아냈다. 이어 그는 "말 못하게 깔아둔 제 안의 무언가를 영화가 건드리는 느낌이다. 감독님이 영화 안의 모든 인물에게 마음을 쓰고 있었다는 생각"이라며 울컥한 이유를 밝히며 "위로받은 만큼 밀도 만큼 (영화를) 알려달라"라고 당부했다.
끝으로 그는 "제가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폴 토마스 앤더슨(약칭 PTA) 감독)를 보고 너무 좋아서 보게된 건데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인터뷰에서 '다음에 내 영화가 잘 되면 PTA 때문이다. 그만큼 나한테 좋은 영향과 자극을 줬다'고 하더라. 저도 윤가은 감독님 덕분에 다음 작품을 잘 만들 것 같다. 윤가은이 한국 영화계를 살렸다"라고 말해 박수를 자아냈다.
임 감독의 겸손을 담은 극찬에 윤가은 감독은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나 관객들은 수긍의 박수로 동의를 표하며 '세계의 주인'을 추앙했다. GV가 끝난 뒤 즉석에서 싸인회도 이어졌다. 극장 측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해당 상영관의 다음 작품 시작 전까지 약 30분 가량 촉박하게 진행된 깜짝 이벤트였다. 그럼에도 관객들 다수가 싸인보다 긴 대기 시간을 버텼다. 그만큼 '세계의 주인'이 준 감상이 만족스럽다는 방증이었다.
같은 마음의 영화인들이 '세계의 주인'을 위한 응원을 이어간다. 4명의 대세 감독들보다 먼저 배우 박정민과 연상호 감독이 GV를 진행한 데 이어, 오는 28일에는 김은희 작가가 GV를 함께 한다. 여기에 오는 11월 1일에는 배우 김혜수, 이어 11월 2일에는 코미디언 송은이가 릴레이 응원 상영회를 통해 '세계의 주인'을 응원한다. 언제나 씩씩했던 주인공 소녀 주인처럼, 불황에도 존재감을 알리는 '세계의 주인'이 유독 기특한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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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바른손이앤에이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