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재동 객원기자] 산포는 늦여름이다. 여름이 가는지 더러는 선선한 바람도 불어온다. 그렇다고 뙤약볕 밑에서 마을버스를 기다리기엔 너무 덥다.
흙먼지를 풀썩이며 차가 선다. 집에서 쓰는 트럭이다. 운전석엔 구씨(손석구 분)가 있다. 타란 말도 없이 턱만 앞쪽으로 삐죽 내밀어본다.
미정(김지원 분)은 말없이 올라탄다. 차가 출발하려던 순간 기정(이엘 분)이 달려든다. 자신만 걸어갈 수는 없다는 결기가 충만하다. 미정이 구씨 옆으로 옮겨타고 기정이 조수석에 안착한 채 트럭은 출발한다.
마을버스를 기다리던 창희(이민기 분)는 핸드폰을 보느라 세 사람을 태운 트럭이 스쳐가는 걸 보지 못했다.
지난달 30일 방영된 JTBC 토일드라마 ‘나의 해방일지’가 본격적인 캐릭터의 성장, 관계의 변화를 보여주었다.
‘나의 해방일지’는 유머러스한 드라마다. 캐릭터가 유발하는 익살, 상황이 불러오는 익살맞은 장면들이 도처에 장치돼 있다.
가령 7화에선 이어폰을 통해 음악을 들으면서 제 감정에 취해 울며 따라부르는 기정의 모습을 담았다. 음악이 흐를 땐 제법 그럴듯한 그 모습에서 카메라는 갑자기 반전해 운전 기사를 담는다. 음악소리도 없고 손님은 달랑 하나뿐인 심야시간대, 기정의 귀곡성같은 읊조림에 섬뜩해하는 기사의 모습을.

기정과 미정이 구씨의 트럭을 이용한 줄도 모르고 “언제 왔어?”라 묻는 창희의 얼빵한 표정도 익살맞다.
드라마는 익살과 연관된 요즘 사용 의미외에도 ‘액체, 흐름, 습기’등을 의미하는 어원이 된 라틴어 명사 ‘umor’와도 맞닿아있다.
고대 생리학은 4액체설(Humor Theory)에서 사람은 혈액, 점액, 황담즙, 흑담즙의 4종류의 체액을 갖고 있으며 이 체액들의 배합 정도에 따라 기분·기질 등이 변화한다고 주장했다. 유머는 인간에겐 없어선 안될 그런 체액이고 습기다.
드라마는 생경하다 싶을만큼 무미건조하게 시작됐다. 한번도 행복한 적 없어 보이는 무뚝뚝한 아버지 염제호(전호진 분)와 출퇴근도 남처럼 제각각 하는 3남매, 사람과는 말도 안섞고 술만 마셔대는 구씨까지.. 사막처럼 바싹 마른 관계들이 거북했다. 하지만 회가 진행될수록 이들 사이엔 물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가장 극적인 변화는 역시 염미정과 구씨에게 찾아왔다. 모든 관계가 노동이라서 눈 뜨고 있는 시간 모두가 노동이라는 염미정. 자존감 바닥인 채로 살아온 시간들 속에서 한 번도 채워진 느낌을 못받아온 미정은 뜬금없이 구씨에게 “날 추앙해요. 가득 채워지게”라고 요구했다. 관계에 서툰 미정의 이 맥락없는 도발을 구씨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언질 하나에 찰떡같이 접수했다.

미정의 차양모를 주워주고, 돈까스를 사주고 적금과 청약통장을 해지해 전 남자친구의 빚을 갚아준 미정에게 대신 받아주겠다며 이름과 전화번호도 물어본다.
아뿔사, 마지막은 잘못된 추앙이었다. “왜 자꾸 바닥을 보래? 사람하고 끝장보는 거 못 하는 사람은 못 한다고. 얼굴 붉히는 것도 힘든 사람한테 왜 죽기로 덤비래?”라고 폭발하는 미정을 위해 라면을 끓여 바친다. 물도 바친다.
그러면서 “나 진짜 무서운 놈이거든. 옆구리에 칼이 들어와도 꼼짝 안 해. 그런데 넌 날 쫄게 해. 네가 눈앞에 보이면 긴장해. 그래서 짜증나. 짜증 나는데 자꾸 기다려. 알아라 좀. 염미정, 너 자신을 알라고!”라고 염미정의 자존감을 추어주어선 끝내 “계속해 보시지, 좋은데!”란 반응을 끌어낸다.
구씨의 추앙이 염미정만을 채워주는 것은 아니다. 남을 채워줌으로써 자신도 채워지는 기쁨을 구씨는 무의식적으로 향유한다. 라면 끓여 바치고 물병 갖다 바치면서도 비죽비죽 웃음이 새어나온다.
미정과의 밤 산책 중 만난 들개 3마리 에피소드는 구씨의 그런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자신에게 이빨을 드러내는 개들을 향해 가려던 구씨는 “짖는 개에겐 가까이 가지 않는 것이 좋아요”라는 미정의 만류에 발걸음을 멈춘다. 아마도 ‘진짜 무서운’ 시절의 구씨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을 것이다. 밤 라이딩을 즐기는 라이더를 향해선 ‘파이팅!’응원도 해줄만큼 공감능력이 진화됐다.

제 잘난 맛에 살던 기정에게도 극적인 변화가 찾아왔다. 조태훈(이기우 분)에 대한 연정이 차고 넘쳐 흐르는데 고백도 못하는 제 신세가 처연하던 차, 벽너머 동생 염창희의 평이 날아와 꽂힌다. “성에 안차는 남자가 고백하면 모욕이라도 당한 듯 쏴죽인다고 총 구해다니던 여자가 어떻게 고백하냐? 잘못 말했다 총맞아 죽을텐데.”
그 업보를 수긍한 기정은 자다말고 손을 모은다. “잘못했습니다. 건방졌습니다. 무례했습니다. 그 옛날 저한테 고백하셨다가 욕 먹으신 님들께 진심으로 참회의 기도를 드립니다. 저 같은 거 좋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박해영 작가의 전작 ‘나의 아저씨’를 닮아있다. 마치 ‘나의~’ 연작 2탄 같다. ‘나의 아저씨’에선 이선균 3형제와 여자 이방인 아이유의 조합이 김지원 3남매와 남자 이방인 손석구로 대체됐다.
스토리 전개도 남녀의 사랑이야기보단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심과 온기에 집중한다. 유행어로 부각된 ‘추앙’이란 단어는 사랑보다는 존중의 의미가 깊다. 작가는 사람 간의 존중이 이 사회를, 인간 관계를 윤기있게 만든다고 확신하는 듯 싶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에게 치유받아야 한다. 서로가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다보면 확실히 사회는 건강해질 것이다.
초반 2%대로 출발한 ‘나의 해방일지’의 7회 시청률은 수도권 3.5%, 전국 3.3%(닐슨코리아, 유료가구 기준)를 기록했다. 시청률과 관계없이 팬층의 열성적인 호응을 얻는 매니아드라마로는 자리잡은 모양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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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JT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