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재동 객원기자] ‘나중’을 믿지 않았던 아들은 말한다 “나중에... 나중에... 눈 말고 꽃피면 오자. 엄마랑 나랑 둘이. 내가 델구 올게. 꼭.” 아들은 알고 있었다. 그 나중은 오지 않으리라는 걸.
돌아오는 차안. 입산통제로 발 묶인 아들이 찍어온 한라산 정상부 동영상을 쉼없이 돌려보며 엄마는 배시시 웃음을 흘린다. 엄마도 알고 있었다. 아들이 말한 나중은 오지 않으리란 걸. 하지만 무슨 상관이랴. 아들은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어했다. 그러면 됐지. 그리고 그런 엄마를 흘깃거리는 아들은 복받친 눈물을 흘린다. 그렇게 엄마는 웃고 아들은 울었다.
tvN 토일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가 막을 내렸다. 옥동(김혜자 분)과 동석(이병헌 분)의 이야기가 마지막 에피소드였다. 옥동은 예정된 죽음을 맞았다. 그녀의 평생은 불행했지만 마지막은 행복했다.
동석이 물었다. “살면서 언제가 제일 좋았어?” 옥동은 답했다. “지금. 너랑 한라산 가는 지금.” 눈 쌓인 백록담 따위 아무렴 어떤가. 저 못나 평생 한만 심어준 아들이, 제 딴에 벼르는 마음이 있던 말던 살갑게 대해 준다.
이제는 저수지로 변한 목포의 고향 마당리도 데려다 주고, 시집가기 전까지 일했던 목포의 구시식당에도 데려다 줬다. 백록담도 보고 싶다니 몇 시간씩 산길을 걸어 한라산 정상부의 풍경도 찍어왔다.
어쩐 일로 저 사는 곳도 보여주었다. 가보니 마침 제가 좋아한다던 여자 민선아(신민아 분)가 와있어 짝 못맺을까 노심초사하던 걱정도 덜었다. 게다가 그 좋아하던 된장을 끊었다던 아들이 어쩐 일로 된장찌개를 끓여달란다. 천만다행으로 아들을 위한 된장찌개 올린 밥상을 차려내도록 명줄은 이어졌다. 이만하면 마지막은 괜찮은 편이다.
엄마는 당연히 제주 여잔줄 알았다. 잘못 알았다. 목포 마당리란 곳이 고향이란다. 그러고보니 엄마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의붓아버지 기일을 맞아 목포에 동행한 것은 전적으로 엄마를 다그칠 작정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단 일 다 들어드리고 따져볼 작정이었다. 왜 자신에게 그랬는지. 그래서 미안하진 않은지. 사랑을 하긴 했는지.

마당리 가는 길 발목 삐끗한 엄마를 업고 내려왔다. 가벼웠다. “다 업힌거야? 뭐야 가죽만 남아가지고.” 제 가슴에 대못을 박었던 그 모질었던 어멍은 가벼웠다. 자신의 시간마저 묵직하게 내리 눌러 평생을 흐르지 못하고 맴돌게 눌러왔던 어멍은 뜻밖에 가벼웠다.
그 어이없는 가벼움이 그예 동석의 억하심정을 건드렸다. “내가 종우 종철이한테 맞을 때 속상하긴 했냐? 다른 엄마들은 자식 아프면 속이 썩어 문드러진다는데. 엄마 아프라고 일부러 맞았는데 어땠냐? 남자가 그렇게 좋았냐? 자식 있어도 남자 없으면 못살겠었냐? 그때 나한텐 아무도 없었는데 아방도 죽고 누이도 죽고 엄마뿐이었는데 엄마라고 부르지 말라고? 그때 나한테 하나뿐인 마지막 어멍까지 빼앗아가 놓고 미안한 게 없어? 어떻게 미안한 게 없어?” 아들 동석은 피흘리는 심정으로 다그쳤고.
“어떤 미친 년이 미안한 걸 알아마씨. 네 어멍은 미친년이야. 미치지 않고서야 딸년 물질시켜 죽이고, 그래도 살거라고 다른 남자랑 붙어먹고, 자식이 세끼 밥 먹으면 되는 줄 알고, 학교만 가면 되는 줄 알고 자식 쳐맞는 걸 보고도 멀뚱멀뚱. 개가 물어뜯을 년. 죽으면 장례 치르지 말어. 울지두 말어. 누이 아방 있는 바다에 던져버려.” 엄마 옥동은 상처 입어 숨이 다한 짐승처럼 그르렁댔다.
엄마 옥동은 한글도 몰랐다. 고향이 마당리인 줄은 알지만 집은 어디께 있었는 지도 몰랐다. 열 서넛부터 남의 식당 일 하다 배타고 온 아방 만나 제주로 왔다. 아방이 자장면을 사주면 그게 잘해주는 것인 줄 알고 살았다.
그래서 뭘 먹자 하면 된장, 아니면 자장면이다. 된장은 아들 동석이 좋아하는 메뉴고 그 다음 자장은 잘해 주었던(?) 동석 아방이 사주던 음식이다. 옥동의 평생 그 두 음식만이 의미있는 메뉴였다.
그제서야 동석은 알았다. 엄마 옥동은 모진 이도, 미친 이도 아니었다. 그저 몰랐던 이였다. 어린 나이에 일가붙이 다 잃어 사랑 받는 법도, 사랑 하는 법도 배우지 못했던 이다. 세상에 의지가지없어 그저 살아내는데 급급했던 가련한 이일 뿐이었다.
왜 아들 맘 몰라주나 원망도 많았지만 정작 자신도 엄마에 대해 하나도 알지 못했다. 고향이 제주가 아닌 목포 마당리인 줄도, 외할머니 이름이 오만경인 줄도, 외할아버지 이름이 강팔판인 줄도 알지 못했다.

엄마는 자신의 부탁대로 된장찌개 올려놓은 밥상 옆에 잠들어 있었다. 엄마의 된장은 맛있었다. 평생의 응어리가 풀리는 맛이었고 고여 맴돌던 동석의 시간이 다시 흐르는 통쾌하고 시원한 맛이었다.
동석은 엄마 옥동을 그러안아 본다. 목구멍을 타고 꾸역꾸역 치밀어오르는 울음을 참지 않는다. 얼마나 오랜 시간 이렇게 엄마를 안고 울고 싶었던가? 다시 되찾은 엄마 옥동의 식은 몸이 서럽다. 밑모를 그리움이 울음을 타고 끝없이 흘러나온다.
우리 어멍 강옥동 여사, 다시 태어나면 돈많은 부잣집에 태어나기를, 돈 걱정 안하고 글도 배우기를, 아방처럼 명 짧은 이 말고 명 긴 사람 만나 오래오래 행복하기를. 그리고 또 한번 착하고 순하게 다시 태어난 자신의 엄마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울음에 섞여 흘러나온다.
옥동과 동석을 연기한 김혜자와 이병헌의 연기력은 백미라 할만하다. 차 안에서 입을 반쯤 벌린 채 잠이 든 김혜자의 얼굴엔 실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듯 했고 “데령가라” “일나도 가” 단답으로 끊어지는 막무가내에선 평생 스스로를 잘 표현하지 못했던 옥동의, 회광반조의 촌각마저 아끼고 싶은 고집이 체감됐다.
이병헌은 평생 엄마에 대한 울화를 쌓아온 홧홧한 남자 이동석을 마치 빙의라도 한 듯 연기했다. 엄마 옥동의 죽음을 맞이하고 망연자실한 표정과 주저앉은 뒷 등에선 사람이 삽시간에 쪼그라든 듯한 상실감과 서러움이 배어나왔다.
‘우리들의 블루스’는 여운이 긴 드라마다. “우리는 이 땅에 괴롭고 불행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오직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제작진의 마지막 메시지도 따뜻하다.
20부작에 걸쳐 15명의 배우들이 제각각 주인공이 돼 펼친 8개의 에피소드는 세상 사는 이야기의 상당 부분을 아우렀다. 관대하지 않은 세상을 살면서 원치 않게 마주치는 상처와 슬픔들을 결국은 미소와 추억으로 승화시키는 현명한 사람들의 행복찾기를 조명했다. 드라마는 감동을 주었고 충분한 위안이 됐다. 작가와 연출, 배우들의 노력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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